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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참을 수 없는 키치의 무거움

2011-09-26


0. 한 장의 사진은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시간과 공간의 틈에서 태어난다. 기계적으로는 사진기라는 틀이 이 틈을 낳지만 어떤 틈을 선택할 것인가는 온전히 인간의 몫, 이 ‘어두운 방’의 창을 언제 어디로 열었다 닫을 것인가는 사진기가 아니라 인간이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에 따라 한 장의 사진은 틀에 박힌 사진에 머물 수도 있고, 틈을 찢는 사진에 이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의 어깨는 사진기가 아니라 사진의 무게에 짓눌린다. 슬그머니 사진기를 내려놓는 방법으로는 이 무거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선택이라는 문턱을 넘어 또 하나의 ‘어두운 방’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이미 자연의 중력장이 아닌 문화의 중력장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방 안에서는 이 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미 들어선 이상 방 밖으로 나가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다. 이쯤 되면 우리의 어깨는 사진의 무게가 아니라 존재의 무게에 짓눌린다. 불행하게도 그러나 또한 행복하게도,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틀이다. 이 어둡고도 무거운 중력장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틀에 박힌 존재에 머물 수도 있고 틈을 찢는 존재에 이를 수도 있다. 이 틀에 대한 설익은 체념은 키치(kitsch)라는 베일을 드리워 사진과 존재 사이의 틈을 차단한다. 만약 키치와 구별되는 예술(kunst)이란 것이 아직 가능하다면 그것은 우선 이 키치를 찢어야 한다.

글, 사진 | 현린


1. 밀란 쿤데라가 굶주린 배에서 나는 꾸르륵 소리에서 우연히 만들었다는 인물 테레사, 불행하게도 그녀의 어머니에게 테레사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치명적인 실수였다. 딸로 인해 자신의 삶을 망쳤다고 체념해 버린 어머니는 희망의 싹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난도질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분신에게서 그 희망을 보게 될까 두려워, “너도 별 수 없다”고 체념을 강요하며 테레사의 삶까지 난도질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녀를 난도질하면 할수록 그로 인해 깊어지는 상처의 틈에서, 테레사는 그 아래 묻혀 있을 어머니와는 다른 자신을 찾기 위해 분투한다. 천박한 수다와 무식한 술주정의 세계에 자신을 붙잡아 두려는 중력에 저항하기 위해 테레사가 처음 선택한 것은 책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이 일하던 카페에 토마스가 책 한 권과 함께 들어섰을 때, 그녀는 새로운 세계로 향한 강이 열리는 것을 본다. 그녀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우연의 강에 필연의 배를 띄운다. 신세계로의 입장권인 책 한 권과 그녀의 삶만큼 무거운 트렁크를 짊어지고 프라하행 열차에 오른 것이다.

쿤데라가 “한 번은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글에서 탄생시켰다는 인물, 토마스는 자신의 방 창가에 서서 테레사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그가 외과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은 환자의 치료나 의사의 지위보다는, 살을 찢고 틈을 벌려 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매력에 끌렸기 때문이다. 그가 “공격적인 사랑” 대신 “에로틱한 우정” 속에서 다양한 여자들과 맺는 관계도, 수술대 위에서 메스로 살을 찢고 틈을 벌리는 해부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테레사와는 미처 해부를 준비할 틈도 없이 관계를 맺고 말았다. 게다가 그녀가 마침 감기를 앓고 있던 탓에 차마 그녀를 침대에서 내쫓지 못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다음날 아침 테레사의 머리맡에서 그만 메타포에 빠지고 말았다는 점이다. 우연의 강이 그의 침대 곁에 실어다 놓은 바구니 안에 잠든 아기, 테레사! 강물에 떠내려 온 이 아기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순간, 이미 그에게 테레사란 더 이상 들여다보는 해부의 대상이 아니라 짊어져야 하는 책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틈을 들여다보기 위해 메스 대신 붓을 든 사비나에게, 운명, 낭만, 진리, 사랑 따위란 역겨운 키치에 불과하다. 그녀는 인간이 의지하고 또 인간을 구속하는 모든 상징과 구호, 원칙과 당위를, 키치라는 이름으로 증오한다. 그녀가 토마스의 “에로틱한 우정”을 이해하는 유일한 애인일 수 있었고, 토마스의 부탁대로 테레사를 잡지사에 취직시키고 사진가로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키치에 대한 증오 때문이었다. 제네바에서 만난 언어학 교수 프란츠가 그녀를 붙잡기 위해 이혼까지 불사했을 때, 그를 피해 파리로 떠나버렸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진리 속에서 살기”를 꿈꾸는 몽상가 프란츠에게 그녀는, 단순히 사랑하는 여인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향한 틈, 진리의 상징이었고, 그녀에게 이는 또 하나의 키치였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키치 아닌 것이란, 불화와 배신과 탈주로 찢어진 캔버스의 틈에서, 그것도 우연히 스치듯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이 ‘참을 수 없는 키치의 무거움’에서 벗어날 틈을 찾아, 사비나는 끊임없이 탈주할 수밖에 없다.


2. 사비나가 보기에 테레사에게 사진이란 또 하나의 키치다. 책 대신 이제 사진기를 들었을 뿐, 테레사에게 사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토마스 세계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프라하의 봄’을 점령한 소련 전차와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촬영하는 동안만큼은 테레사 역시 토마스를 잊었지만, 이 또한 “사랑 키치”에서 “민주주의 키치”로 잠시 옮겨갔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취리히에서 “선인장” 사진 촬영을 권유받았을 때 테레사가 사진을 포기하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테레사로서는 보다 내밀한 이유가 있었다. 어렸을 적 그녀는 벌거벗고 집안을 활보하는 어머니가 부끄러워 창에 커튼을 치고는 했고, 어머니는 그런 딸을 조롱했었다. 그런데 잡지사의 편집장과 사진가는 생식기가 적나라하게 노출된 누드비치 사진을 놓고서, 공산주의자들은 너무 청교도적이라며 그녀를 조롱한다. 가장 멀리 떠나왔다고 생각한 이 자본주의 세계에서도 어머니의 중력은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도 체념을 강요했다. 테레사로서는 체념하지 않기 위해서 포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진을 포기한 뒤 토마스에 대한 집착의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취리히에서도 토마스를 온전히 소유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결국 그녀는 체념의 늪에 빠졌고 중력에 몸을 맡긴 채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더욱 무거워진 도시 프라하로 돌아와 토마스를 만나기 전처럼 다시 카페에서 술을 따른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토마스도 테레사의 의도대로 그녀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강요했고 그녀가 그렇게 거부했던 체념에 빠진 테레사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그러했듯 이제 토마스의 삶을 난도질하기 시작한다. 유능했던 외과의는 처음엔 아스피린이나 처방하는 변두리 일반의가 되었다가 나중엔 유리창 청소부가 되었고 결국엔 시골의 트럭 운전수가 된다. 메스를 잡을 일은 물론이고, 창을 닦을 일도, 다른 여자를 들여다 볼 일도 없는 이곳에서, 토마스는 테레사의 토끼로 길들여져 간다. 가엾은 토마스는 처음으로 진정한 휴가를 즐기게 되었노라 자위하며 살지만, 어느 날 그가 수리했던 낡은 트럭의 브레이크는 작동하지 않았고, 중력에 끌려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흙 아래 묻히고 만다.

우울할 때면 묘지를 산책한다는 사비나는, 토마스와 테레사의 키치적 삶이 막을 내렸음을 전해 듣고 순간, 자신 역시 토마스로부터 그리고 키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깨닫는다. 키치에 대한 증오 덕분에 그녀는 적어도 테레사처럼 비상을 꿈꾸다 체념 속에서 자멸하지도 않았고, 토마스처럼 사랑이라는 메타포에 빠져 추락하지도 않았으며, 프란츠처럼 철지난 좌익 대장정을 따르다 태국의 뒷골목에서 말 대신 몸을 쓰다 맞아죽지도 않았다. 그러나 토마스의 부고가 그녀 존재의 틈을 찢어 드러내고 말았으니, 키치라는 이름으로 여태 그녀가 경멸했던 것들을, 그녀는 사실 간절히 갈망하고 있었다. 그녀가 증오했던 것은 키치가 아니라 차라리 존재 자체였다. 이 엇나간 증오는 다름 아닌 그녀의 너무 이른 체념에서 시작되었다. 부모를 잃던 순간에 사비나는 이미 삶에 투항해 버렸다. 그녀의 모든 배반과 불화와 탈주는 이 최초 투항의 변주에 불과했다. 묘지에 묻힌 세 사람처럼 삶에 뛰어들 자신이 없었던 사비나는, 부모의 장례식 이후 계속 묘지를 떠돌고만 있었다. 그녀는 삶의 강이 아니라 죽음의 늪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이른 체념에 대한 자각과 후회는 너무 늦게 찾아 왔다.

3. 가장 나약하고 가장 동정 받아야 할 사비나와 같은 산송장들이 “너도 별 수 없다”며 체념을 강요하는 시대에 우리는 산다. 이들은 진리와 윤리는 물론이고 심지어 신념 자체도 키치라는 이름으로 조롱한다. 조중걸에 따르면, 이들에게는 “신념이야말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키치인 것이다. 어떤 이념, 어떤 정치적 슬로건, 어떤 과학적 진실, 어떤 예술적 미학이건 키치를 벗어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념은 모두 키치인 까닭이다.” 그러나 가히 키치 범신론자들이라 할 이들에게도 신념은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신념은 키치”라는 신념이다. 다만 이들도 이율배반은 두려웠는지, 자신들의 신념은 진지하지 않다는 단서를 단다. 키치를 조롱할 뿐 증오하지는 않는다. 증오 또한 신념과 마찬가지로 키치이기 때문이다. 신념을 조롱함으로써 동시에 이들은 신념의 토대가 되는 존재 자체도 조롱한다. 이렇게 자신의 신념과 발언, 토대와 존재 자체를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그들은 키치를 벗어날 수 있다고 ‘농담’한다.

사비나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테레사와 토마스 그리고 프란츠가 짊어졌던, 그래서 결국 그들을 추락하게 만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참을 수 없는 키치의 무거움’으로 대체했지만, 키치를 조롱하지 않고 증오함으로써 그녀는 ‘존재 키치’에 빠지고 만 것이다. 키치의 중력에 너무 진지하게 저항했던 탓에 존재의 중력에 눌리고 말았다. 아니, 존재의 중력에 너무 일찌감치 눌렸던 탓에 키치의 중력에 제대로 저항해 보지도 못했다. 그녀는 보헤미아에서부터 이미, 몽파르나스의 그것보다 더 무거운 석관 아래 깊은 무덤 아래 묻혀 있었던 것이다. 테레사 어머니의 삶이 테레사가 체념에 저항하도록 했다면 사비나 어머니의 죽음은 사비나가 체념에 투항하도록 했다. 때문에 사비나에게 틈이란 시작부터 테레사의 그것과 반대로, 지상이 아니라 지하를 향해, 그것도 중력 영점지대를 향한 것이었다. 그래서 ‘참을 수 없는 키치의 무거움’이 커질수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덜떨어진 사비나와 달리 존재 자체를 제대로 희롱하는 이들에게는, 참고 말고 할 것이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참느니 마느니 하는 순간 그들도 ‘존재 키치’의 늪에 빠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존재를 무시한다. 소크라테스가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무엇이나 된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의 무지를 찢어 드러내 “그의 시대의 역겨운 키치를 극복”하고자 했다면, 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소크라테스나 된 듯이 무엇이건 무시하며 자신의 무지를 덮는다. 그러니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어두운 방’, “우리 시대 고유의 키치”란, 소크라테스를 조롱하는 그러나 소크라테스를 가장한 ‘소크라테스 키치’다. 제대로 된 신념이 없기에 그들에게는 제대로 된 체념 또한 없다. 그렇다면 테레사와 토마스, 사비나와 프란츠, 이들 모두의 삶을 키치라 조롱하는 그들은, 이 ‘어두운 방’ 어디에 있을까? “너도 별 수 없다”며 체념한 듯 무념을 짖어대는 이들의 창은, 이 ‘어두운 방’ 어디에 열려 있을까? 추측컨대 그들은 창을 열고 틈을 찢는 대신, 그 틀 어딘가 찢겨진 틈에 끼어 있다. 달콤한 기만과 시큼한 분열의 틈.


* 본 기사는 <월간사진> 2009년 10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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