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전체보기

분야별
유형별
매체별
매체전체
무신사
월간사진
월간 POPSIGN
bob

아트 | 리뷰

40년 국토 사진가의 고집스런 열정

2011-11-07


“농기구나 생활도구가 농가에 걸려있는 사진이 마지막일 것 같아요. 박물관으로 다 들어가기 전에 찍으려고요. 박물관에 들어가면 죽은 도구, 즉 유물이 돼버려요.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찍은 뒤 우리 전통문화에 관한 작업은 내려놓으려 합니다.”

황헌만(64)의 전통문화 사진 아카이브는 엄청나다. 지금껏 사진책으로 발표된 것만 기층문화 연구 시리즈로 열화당에서 나온 ‘장승’과 ‘초가’ 그리고 ‘조선땅마을지킴이’, ‘한국의 세시풍속’(학고재), ‘도산서원’(한길사), ‘옹기’(열화당), ‘하회마을’(솔) 등 유교나 불교와 관련된 의례에서 과거 생활상과 유물유적 사진까지 빼곡하다. 발표되지 않은 사진 분류는 이보다 더 많다. 지난 40년간 우리 국토를 종으로 횡으로 훑으며 목격한 것들을 차곡히 사진에 담아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국토 사진가’ 또는 ‘민속 사진가’로 불린다. 친한 이들이 부르는 별명은 따로 있다. 바로 ‘황고집’이다.

고집스럽게 우리 땅의 것들을 찾아다닌 그가 이제 유물 사진은 갈무리하려 한다. “누군가는 민속의 모습을 찍어 남겨야해 시작한 작업이 매력적이어서 못 내려놓았는데, 이제 더 찍을 대상이 사라지고 없어져요. 그나마 남은 것들은 인공적이어서 옛 맛이 안 납니다.” 오래 전 그가 쌍계사 앞에서 찍은 장승은 이제 민속박물관에 들어가 있고, 한국 초가의 원형이라던 충북 오지의 압실마을은 댐 건설로 수장되었다.

기사제공 | <월간사진> 2011년 5월호


압도적인 임진강의 역사인문지리서

그럼에도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과 생태에 대한 황헌만의 답사와 창작, 촬영은 숙명처럼 쉼이 없다. 이번에 그가 전시와 책으로 선보인 작업은 ‘임진강’(역사만들기 펴냄)이다. 임진강과 한강 두 강이 만나는 지명을 가진 교하(交河)에 살면서 3년간 정성을 쏟은 작업이다. 파주문화원의 의뢰로 시작해 책으로 나왔지만 계속 개인작업으로 임진강을 기록해왔다. 그는 “한반도의 중심을 흐르는 임진강은 한국전쟁의 아픔까지 베어 있는 현대사의 현장이다. 그 이름만 들어도 이 땅의 역사가 떠오르는 곳, 그곳에 사진기를 들고 선다는 것, 한반도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임진강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은 사진가로서의 내 꿈이다”고 적고 있다.

임진강의 풍경, 자연, 생명, 사람, 시간(유물과 유적), 공간(철조망과 경의선)으로 나뉜 사진책은 기록지(誌)를 보는 것처럼 촘촘히 분류되고 사진마다 세세한 설명글이 달린다. ‘나루터와 고기잡이’에도 따로 한 챕터를 할애했다. “작품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임진강의 전방위 기록입니다. 강에는 자연과 생명도 있지만 사람도 있어요. 우리의 모습이면서 임진강의 현재 모습입니다.” 삼국시대부터 세 고대국가가 각축을 벌였던 이곳은 지금까지 산성터가 남아있고 유물이 발굴된다. 발굴 현장을 놓치지 않고 찾고, 출토되는 유물의 가치를 적은 글에는 그의 억척스러움과 전문적인 식견을 엿볼 수 있다. 지역 문인들의 스터디나 임진강 관련 행사도 빠뜨리지 않고, 특별 허가를 받아 비무장지대도 드나들었다. 임진강의 지정학, 생태학적인 중요성과 분단 현실이 그만의 집요한 시선으로 아로새겨졌다.

강을 둘러싼 통한의 아픔과 상처는 적벽에 새겨지고, 헤어짐과 그리움은 한강을 만나 역동적인 힘으로 바뀐다. 강을 따라 무수한 생명의 탄생과 몸짓은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이처럼 황헌만의 사진에는 임진강을 따라 역사의 아픔과 생명의 강인함, 삶의 연속성, 강의 역동적인 가능성까지가 절절하게 펼쳐진다.

황헌만의 오랜 지기인 국토학교 교장이자 시인인 박태순은 “임진강은 우리 시대의 기호이자 상징이다. 닫힘의 강에서 열림의 강으로 달라져가는 이 강의 희망이 바로 한국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하여 임진강의 자연환경, 인문지리가 되살아난다. 임진강 서정의 아름다움, 임진강 서사의 장쾌함, 임진강 토속과 민속의 여유만만, 임진강 문화역사의 강인한 특성을 황헌만 사진이 세세히 호출해내고 있다”고 말한다.


정직한 기록사진과 우리 것이 선사하는 감동

지난 3월 중순, 서울 인사동의 인사아트센터에선 황헌만의 첫 개인전 <임진강> 이 열렸다. ‘출석 부르는 것 같아 싫다’며 외면하던 전시를 언론계와 사진계의 동료와 후배들에 등떠밀려 처음 갖게 된 것이다. 미국 유학시절에 황헌만과 인연을 맺은 사진가 최광호는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아름다움은 곧 잊혀지고 아픔이 솟는다”고 했다. 남북을 가르는 임진강의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으로만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황헌만의 역설적인 임진강 이야기는 정직한 사진으로 관객과 만났다. 우리 땅과 문화 사진은 왜곡 없이 본 그대로를 찍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오랜 소신이다. 임진강 사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옛 것을 통해 우리 문화를 다시 보려는 사진에서 테크닉은 중요치 않아요. 욕심을 버리고 기다려야 얻는 사진들이죠.” 그의 사진장비는 단순하다 못해 궁색하다. 필름카메라 때 쓰던 렌즈를 디지털카메라에 맞게 깎아서 사용하는 중이다. 전시작품이 팔리면 800mm AF 렌즈를 사려고 했는데 잘 안될 것 같다며 웃는다.

“나만 좋아서 해왔는데 이번에는 가족들이 더 좋아해줘서 기뻐요. 우리 땅과 정직한 기록사진에 관한 감동을 나누는 자리로서 만족해요. 아쉬운 점은 분단문제를 더 깊이 못 보여줬다는 점이에요. 아직 책이나 전시에 공개할 수 없는 사진이 많아 안타까울 뿐이에요.”


어린이 눈높이 맞춘 사진동화도 펴내

우리 전통문화와 땅에 고집스럽게 매달려온 황헌만은 이를 친숙하게 알리는 데에도 열심이면서 색다른 시도를 해왔다.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 벌써 10여권의 책으로 나온 어린이를 위한 사진동화가 그것이다. 오랜 시간 자연을 관찰하고 변하는 모습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사진과 글로 구성했다. ‘민들레의 꿈’, ‘민들레 일기’, ‘섬서구메뚜기의 모험’, ‘날아라 재두루미’, ‘춤추는 저어새’ 등이 선보였고, 보다 이야기가 촘촘해진 ‘새가 본 우리 농사법’, ‘새가 사랑한 나무’ 등을 준비하는 중이다. 2년 넘게 같은 장소에서 북한산을 담고 있는 작업도 흥미롭다. 장시간에 걸쳐 산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상을 기록함으로써 때로는 절규하고 때로는 환호하는 우리 산의 살아있는 표정을 담는다는 계획이다.

서라벌예대 사진과를 나온 황헌만은 중앙일보 출판사진부 사진기자와 ‘우먼센스’와 ‘엘르’ 등 여성지와 패션지의 사진부장을 거치며 화려하고 감각적인 사진을 찍어왔다. 한편으론 대학 시절부터 품고 있던 우리 것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틈틈이 기층문화를 기록해왔다. 한순간에 시선을 잡아끌어야 하는 사진이 금방 유행을 탄다면 전통문화 사진은 긴 생명력을 갖기 때문이다. 사진의 본질을 고민하며 긴 시간을 돌아온 황헌만의 사진은 우리 문화와 땅을 만나 압도적인 생명력과 역동성을 내뿜는다.






facebook twitter

월간사진
새롭게 떠오르고 있거나,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진가가 월간사진을 통해 매달 소개되고 있습니다. 월간사진은 사진애호가와 사진가 모두의 입장에서 한발 앞서 작가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심도 깊은 사진가 인터뷰와 꼼꼼한 작품 고새로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대표 사진잡지입니다.

당신을 위한 정글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