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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필름의 향: AURA No˚ 5

2012-01-16


1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영화보다 사진을 사랑했다. 영화 역시 수많은 낱장의 사진들로 이뤄진 것이지만, 그가 보기에 영화의 스크린(screen)과 스토리(story)는 사진의 ‘정수’(精髓, essence)를 가리고 흐리기 때문이다. 사실 스크린은 그 위에 투사된 영상의 배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스크린 아래를 가린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가리개이기도 하다. 스크린 위의 스펙터클(spectacle)을 주시하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스크린 아래의 현실은 무시하게 된다. 우리의 시각은 스크린 위와 아래를 동시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크린 위에 투사된 본래 낱장의 사진들은 초당 무려 24장씩, 심지어 30장씩의 빠른 속도로 점멸하며 흐른다. 우리의 시각은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스크린 위에 머물다 사라지는 낱장의 사진들을 포착할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사진들의 잔상(殘像)이 만들어내는 스토리에 몰입하게 된다. 이때 이 스토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여기 내장된 코드들을 해독(解讀)함을 의미한다. 해독의 대가였던 바르트에게 이는 코드에 길들여짐을 의미했고, 이는 스크린과 스토리에 가려지고 흐려진 사진 고유의 정수를 놓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곳에서 영화보다는 스틸(still) 사진을 좋아한다고 밝혔고, 급기야 ‘밝은 방’(La Chambre Claire, 1980)에서는 길들여진 ‘좋은 사진’보다는 길들여지지 않은 ‘미친 사진’을 사랑한다고 밝힌다.

글, 사진 | 현린
기사제공 | 월간사진

물론, 사진 역시 코드화되어 있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길들여진 그것에 바르트는 스투디움(studiu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현실을 기계적으로 재현한 것이 사진인 까닭에, 우리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혹은 주목하지 않은, 그래서 코드화되지 않은 그 무엇을 사진에서 만날 수 있다. 바르트는 그것에 푼크툼(punctum)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처음 그가 주목한 것은 사진 속 공간에서 자신만이 주목하고 찾아내는 세부(detail)였다. 하지만 이러한 푼크툼은 너무나 특수해서 사진의 정수라 하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반면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후 그가 발견한 또 다른 푼크툼은 사진의 정수라 하기에 부족함 없이 보편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가 본 적 있을 리 만무한 다섯 살 소녀 시절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며 그가 돌연 깨달은 것은, 사진 속에서는 그녀가 존재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곧 부재하리라는 사실, 즉 그녀의 죽음이었다. 모든 사진은 비록 과거의 사건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미래의 사건, 도피하고 망각하려 하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이 치명적인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부의 확인으로서의 공간적 푼크툼과 구별되는, 죽음의 확인으로서의 시간적 푼크툼이다. 바르트는 이 필멸의 진리가 선승(禪僧)들이 가리키는 달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는지, 엄연히 자신만의 스토리인 이 경험은 스토리라 하지 않고 대신 ‘사토리’(satori) 즉 선승들이 말하는 돌연한 깨달음이라 불렀다.

바르트에 따르면, 사진의 이러한 특성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어두운 방)보다는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밝은 방)에서 더 잘 드러난다. 사진은 바늘구멍을 통과해 어두운 상자 한쪽에 맺힌 단일한 영상이 아니라, 불투명한 프리즘을 통과한 후 거울에 반사된 상과 종이 위에 그려나가는 상이 동시에 맺히는 이중의 영상이라는 것이다. 그 불투명한 프리즘 덕에 더욱 모호하고, 두 영상이 겹쳐진 덕에 더욱 애매한 ‘부드러운’ 영상은 과연 유령다웠으니, 급기야 바르트는 사진이라는 매체(medium)를 유령과 접신하는 영매(medium)로 간주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스크린이건 종이건 그 가면을 찢고 나오는 그녀만의 ‘분위기’(stimmung) 곧, 그녀의 ‘영혼’을 그는 사진에서 만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진의 정수는 어느새 그녀의 정수가 되고, 사진이 가리킨다고 그가 믿었던 달(Luna)은, 그가 그토록 자부하듯, 사랑과 연민으로 정신을 잃은 광기(lunacy)가 된다. 요컨대, 바르트는 스토리의 영화와 스투디움의 ‘좋은 사진’과 달리 코드에 길들여지지 않은 사토리와 푼크툼의 ‘미친 사진’에서, 사진의 정수와 그녀의 정수를 찾는다. 선승들이 말하는 사토리란 것이 실제로는 영혼이나 정수 따위란 없음을 깨닫는 것이라는 점에서, 바르트의 사토리는 사이비임이 분명한데, 여하튼 한 장의 정지된 사진 위에서 펼쳐진 어머니에 대한 그의 스토리는 이런 식으로 끝을 맺는다. 미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영사기는 꺼지고 한 장의 사진, 그 스크린은 곧 어둠에 묻힌다. 하지만 어두운 방에 바르트가 남기고 간 광기는 여전히 남는다. 달이 저물지 않은 탓이 아니라 달이 저물고도 남는 그 향 탓이다.

향을 피우는 종교의식은 상징적인 정화나 성화 과정일 뿐만 아니라 향이라는 지극히 실제적인 질료로 후각적 공간을 건축하는 과정이다. 그 성은 오랜 세월 견고하게 축적되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 까닭에 더욱 성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것들이 코드화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외지인이 해독하지 못할 뿐. 시각과 언어와 거리가 먼 후각 역시 엄연히 코드화되어 있어서,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후각적 지도라는 것이 있을 정도다. 이 코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오독의 결과로 흔히 저지르는 잘못이, 잘 알려져 있다시피, 특정 코드를 야만시하거나 또는 신비화하는 것이다.


2 장-바티스트 그르누이(Jean-Baptiste Grenouille)는 영화도 사진도 아닌 향수를 사랑했다. 그래서 어두운 방은 이제, 역시 어머니 때문에 미쳐버린 그르누이의 몫이다. 패트릭 쥐스킨트(Patrick S?skind)의 ‘향수’(Das Parfum, 1985)에서 어머니의 정수는 그녀의 영상이 아니라 그녀의 향기에 있다. 바르트의 말대로 만약 사진이 그녀의 정수를 담고 있다면, 이 역시 사진에 남겨진 그녀의 영상이 아니라 사진에 남겨진 그 향기 때문이다. 빠르건 느리건 그 많은 사진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만큼 진하게 그녀의 향기가 밴다. 그러니 그르누이로서는 영화와 사진을 차별할 필요가 없다. 영화가 상영되건 사진이 펼쳐지건 무관하게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코를 벌름거릴 것이다. 눈을 감은 그에게 스크린은 배경도 가리개도 될 수 없다. 사진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점멸하며 흐를 때 바르트가 사진의 정수들을 잃는다면, 사진들이 쏟아질수록 그르누이는 그 정수들에 오히려 더 흠뻑 젖어든다. 다만, 그의 후선(嗅線)은 영상이 쏟아지던 스크린이 아니라 영상을 쏟아내던 영사기를 향할 것이다. 그에게는 어둠 속에서 식어가는 저 필름릴이야말로 유일한 달이다. 정수는 스크린이 아니라 영사기 안에서 데워진 필름에서 발향(發香)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태어난 1738년 7월의 파리에는 영화는커녕 사진도 없었다. 그러니 그에게 어머니의 사진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사랑하고 말고 할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는 후각적 사진이랄 수 있는 향수에 더욱 미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르누이는 그의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8백 년 동안 시체가 썩어가던 묘지 위에 세워진 장터에서도 악취를 내뿜는 생선더미 아래에 마치 배설이라도 하듯 그를 낳은 어머니는, 앞선 네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이 다섯째 아이 역시 죽게 내버려둘 참이었다. 그런데 그의 울음 때문에 죄가 발각되어 그녀는 참수형에 처해졌고 그는 살아남았다. 억척스럽게 태어난 그는 이후의 삶도 억척스럽게 이어간다. 여느 아이들처럼 달콤한 향은커녕 냄새 자체가 없었던 그는, 자신이 돈벌이에 유용함을 증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탓이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재능이자 행복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후각적 감각과 쾌락이었지만, 살아남기 위해 열다섯 살 무렵에 그가 하던 일은 악취를 참아내며 가죽을 손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불꽃놀이에 넋을 잃고 있던 어느 축제일, 그의 삶에도 마침내 구원의 빛이 아니, 구원의 향이 나게 되니, 그것은 그의 천재적인 후각적 감각이 찾아냈으나 그의 기형적인 도덕적 무감각이 무참히 꺾어버린, 이제 막 꽃을 피우던 여체의 신비로운 향이었다. 그는 그 향의 재생에 나머지 삶을 바치기로 하고, 마침 대량생산의 길에 들어선 향수업계에 ‘사랑과 영혼’이라는 향수를 복제하며 입문해 도제생활을 시작하고 나중엔 향수의 도시 그라스로 유학까지 떠나게 된다. 그런데 고산 동굴에서의 수년간의 칩거가 보여주듯, 그의 여행의 목적지는 어머니의 자궁이었고 그가 재생하려는 향이란 그 자궁의 향에 다름 아니었다. 바르트가 어머니의 정수를 눈으로 확인하고자 했다면, 그르누이는 코로 확인하고자 했던 셈이다.

문제는, 바르트와 달리 그르누이는 자신이 찾는 것이 어머니의 정수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직접 찍는다는 점이다. 사진과 달리 향수는 단지 빛을 매개로 한 대상의 흔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대상의 일부다. 상대의 정수를 얻기 위해서는 셔터를 끊는 대신 둔중한 몽둥이로 상대의 정수리를 내리쳐서 숨을 끊어야 한다. 그런 후에, 형태에서는 스크린과 닮았지만 기능에서는 필름과 쏙 빼닮은, 유지(油脂)를 바른 하얀 천으로 사체를 덮어 싸서 향을 추출(distillation)한다. 그런데 향수를 위한 이 스크린 또는 빈 필름을 감아 들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서는 그르누이는 자신이 찍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때문에 그는 어머니의 정수 대신 애꿎은 여인들의 정수리만 내려찍고 다닌다. 결국 그는 어디에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름 ‘그르누이’(grenouille, 개구리)가 의미하듯 아누라(Anura, 양서류)처럼 경계에서 갈팡질팡한다. 지고지순한 향에 몰입하기 위해 올라간 고산에서는 타자의 악취보다도 더 무서운 자신의 무취에 경악하고, 자신만의 향으로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내려온 도시에서는 자신이 제조한 아로마(Aroma)에 발정하여 바지를 내리고 치마를 걷어 올리는 그들의 무지를 경멸한다. 무취 때문에 있어도 없는 듯했던 존재가 이제는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듯하고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듯하다는 신비한 존재, 바람과 숨의 여신인 아우라(Aura)의 화신이 되었지만, 이 모든 것이 후각적 몽타주의 효과일 뿐임을 그 자신만은 아는 까닭이다. 결국 악취의 고향인 파리의 묘지로 돌아온 그는, 아이의 그것보다 달콤한 그 향을 바른 자신의 몸을 굶주린 자들을 위한 양식으로 내놓는다.

모로코 무두공장의 풍경을 영상으로만 볼 때 지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재미있는 선과 면의 구성과 울긋불긋한 색채가 전부였다. 하지만 막상 현지의 공장 담을 넘어섰을 때, 그 얄팍한 시각적 환상을 찢고 들어온 양피의 역한 냄새라는 후각적 현실은 호흡을 줄일 것을 강제할 정도였다. 바로 저 가죽 냄새를 없애는 과정에서 근대 향수산업이 발전했는데, 그 냄새는 결코 양피만의 것이 아니라 인피의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과연 인피에서 아름답고 순수하고 신비로운 아우라란 것을 추출하는 것이 가능할까 의문스럽다. 물론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비누와 향수가 팔리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런 아우라란 오히려 비누와 향수 광고사진의 작품이 아닐까.


3 태내에서의 감각과 기억까지 고려하면 확실히 어머니의 향기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어머니의 정수라 할 수 있으니, 어쩌면 바르트가 찾았던 것은 오히려 그르누이만이 찍어낼 수 있는 향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가 말하는 카메라 루시다가 실제로는 두 개의 영상이 아니라 어머니의 영상과 어머니의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고, 그가 말하는 시각적 푼크툼이란 실제로는 지극히 후각적 스투디움이었던 것이다. 다만 시각과 후각을 구별하지 못했기에 그 역시 자신이 찾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분위기나 유령이란 어머니의 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광기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절망으로 빠져든다. 그르누이의 향수도 재생이 아니라 재현이었을 뿐임을 고려하면, 그것은 기껏해야 가죽의 자취거나 체취일 뿐 결코 가죽을 찢거나 투과하는 정수는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바르트는 죽은 자의 사진에 산 자의 삶까지 묻고 애도했고, 그르누이는 죽은 자의 향수를 위해 산 자의 삶까지 꺾고 우울해 하지 않았던가. 바르트 어머니의 사진과 함께 서랍 속에 들어 있던 향수와 그르누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 있던 양수, 그 둘을 모두 닮은 달의 향이라도 뿌린다면 모를까, 삶의 정수가 아닌 죽음의 정수에 눈과 코를 들이댄 이상 그 애도와 우울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 듯하다. 그러니 눈과 귀로 다만 고정하고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눈과 귀와 함께 몸으로 살아내는 삶의 정수에 고개를 돌리는 편이 나을 듯싶다. 그곳의 향기는 어떠냐고? 글쎄, 이름은 들어 보셨을라나? AURA No˚ 5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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