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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노모, 전원일기, 공장 가는 길

2012-06-26


사진가가 선정하는 온빛사진상의 1회 수상자가 선정됐다. 온빛사진상은 한해 동안의 다큐멘터리 사진작업을 응모받아 사진가들의 투표로 수상자를 가린다. 사진가가 인정한 ‘올해의 사진작업’이라는 점에서 어떤 상도 갖지 못한 명예를 안겨준다. 초대 수상자인 한설희의 ‘노모’ 작업과 1차로 선정된 10편의 포트폴리오 중에서 이유의 ‘전원일기’, 박주석의 ‘공장 가는 길’ 3편을 작가의 일문일답 인터뷰와 함께 싣는다. 2012년 2회 온빛사진상은 오는 12월경 응모를 받을 계획이다.

기사제공│월간사진

지난해 갑자기 아버지가 타계하시고 황망해하던 중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늙고 병들어, 앙상하니 겨울나무 마냥 바싹 말라버리고 쇠잔해지신 어머니가 곁에 계셨다.

이 시대의 마지막 조선여인의 삶을 사셨던 어머니, 그 시절 흔하던, 바람나서 신여성을 찾아 떠나신 아버지를 한 평생 이제나 돌아올까 기다리고 사셨던 어머니.

아버지는 끝내 조강지처에게 돌아오시지 않았고 배우지 못하고 평생 호강 한번 못하고 지지리 고생만 하시다 인생이 슬며시 흘러가 버린 어머니.

북녘 외딴 작은 섬에서 태어나고 자라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뭍으로 왔으나 이제 늙고 병들어 다시 외로이 홀로 섬처럼 방안에 갇혀 버린 어머니. 그 방안에는 거울에 고인 슬픈 세월과 신앙만이 출렁인다.

나 이제 나이 들어 내 아이들의 어머니로, 아내로서의 인생을 살아보며 겨울나무와 같은 나의 어머니의 스산한 여인으로서의 삶에 더욱 더 가슴이 아려온다. 그 어머니의 남은 날들을, 늙어 다시 외로운 섬으로 갇혀버리는 여정들을 카메라에 담아보려 하였다.

어머니와 정서적인 공감을 이뤄가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연로하신 어머니를 돌봐드리려 자주 찾아뵙게 되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홀로 남은 어머니를 다시 보게 되었고 얼마 남지 않은 모습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자주 뵙다보니 더욱 이해하게 되었고 또 어머니를 익숙한 어머니로서만이 아닌, 조금 떨어져서 보는 객관적인 시각으로도 보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신가? 여필종부, 한번 결혼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생각을 갖고 돌아오지 않는 지아비를 한평생 해바라기 하셨다. 1920년생으로 마지막 조선여인의 삶을 사셨다고 말하고 싶다.

촬영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사진에 이해가 없으셨다는 점과 움직이지 않고 좁은 방안에서 거의 누워계시기만 해 다른 모습을 찍을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쉬웠다.

온빛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됐다. 소감은? 응모한 여러 수준 높고 훌륭한 작품들을 감탄하면서 보았다. 나이 많은 내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이와 상관없이 위축되지 말고 열심히 하라는 격려로 생각하며, 뽑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다큐멘터리 사진작업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좋은 선생님(성남훈 작가)의 강의와 같이 배웠던 학우들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노모 작업 전에는 판교에 관한 사진을 찍었었다.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점차 다큐의 매력에 빠지는 느낌이다. 기록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구현하는 좋은 사진을 찍고 싶은 열망이 크다.

한설희는 1968년 이화여대 불문학과를 졸업했고 중앙대 사진아카데미, 매그넘 워크숍 2회(아바스, 데이비드 앨런 하비), 매그넘 마스터스 클래스(2010년)를 각각 수료했고 2011년 제1회 온빛사진상을 수상했다.

농촌의 20년 후는 가능한가?

나는 충청남도 부여에서 초등학교를 나왔다. 16년이 지난 2008년 명절에 찾은 나의 모교 대왕초등학교는 기억 속 그대로였지만 학생 수는 17년 전 166명(1992년)에서 현재 53명(2009년)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나의 고향은 농촌이다. 전통적으로 농업은 가족의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농사일의 특성상 특정시기의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해 농번기와 농한기가 확연히 구분된다. 이러한 농업사회는 광복 후 정부의 정책에 따라 1차 산업의 희생 위에 도시와 공업을 중심으로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러한 정책방향에 따라 우리나라는 더 선진화되고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1차에서 2, 3차 산업으로 이동이 빠르게 진행되며 도시가 급속히 팽창하게 되었고 농어촌 사회는 몰락 위기에 놓여있다.

오늘날, 서울 및 수도권과 광역시에 살아가는 인구가 전체의 70%에 육박하고 있다. 더욱이 30% 미만의 시골인구는 대부분이 고령이며 이들에 의해 시골의 경제와 문화가 유지되고 있다. 이들이 생을 마친다면 농촌을 지켜낼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다. 나의 작업은 이러한 인구의 변화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충청남도 소재의 27개 초중학교와 5개 마을을 기록했으며 3년의 기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기록해 나갈 계획이다. 2년이 경과한 지금, 2개(남산초등학교, 장암중학교) 학교가 폐교되었다.

사진 속 레드카펫과 서로 손을 잡은 포즈가 의미하는 바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대전으로 이사하면서 한동안 부여에 대한 그리움에 묻혀 지냈던 기억이 뚜렷하다. 레드카펫은 나의 추억의 공간이면서 추억을 간직해준 사람들에게 주는 상과 같다. 손을 잡은 포즈는 시골사람들의 문화를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농업은 가족의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으로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많은 노동력을 투입한다. 이러한 부분은 가족 그리고 시골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레드카펫 위에서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줄을 서면서 문화나 감성이 묻어나도록 했다.

단체사진의 형식을 택하게 된 이유는? 우리나라는 농업이라는 1차 산업의 희생 위에서 도시와 공업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이로 인해 더 선진화되고 부강한 나라가 된 반면 농어촌사회는 몰락의 위기에 놓였다. 이러한 시골의 변화를 인구로 상징화했다고 생각한다.

섭외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아버지가 교육공무원이셔서 5개 학교 교장선생님을 소개받았고 이 분들을 통해 다른 학교를 소개받는 식으로 모두 27개 학교를 기록했다. 마을 촬영은 섭외부터 촬영까지 좀더 어려웠다. 이장님과 노인회장님을 설득하고 촬영일자를 정했지만 막상 당일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아 허탕을 친 적이 3번이나 있었다. 영정사진도 병행해서 찍어드렸는데 영정사진만 찍고 단체사진에는 참여하지 않는 분들도 많았다.(웃음)

전원일기의 향후 작업 계획은? 달라진 변화상을 3년 단위로 재촬영할 생각이다. 3년째가 되는 올해 9월부터 재촬영에 들어간다. 또한 도시와 시골의 몇 학교를 섭외해서 도시와 시골에 관한 아이들의 생각을 확인하는 그림일기를 구상하고 있다. 또한 단체사진이라는 거시적 느낌과 함께할 수 있는 미시적 이미지를 작업하려고 구상 중이다.

이유(32)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며 돈의 본질에 궁금증을 가졌고, 그 호기심은 개발의 공간으로 이어졌다. 4대강, 신도시, 시골학교와 마을 등 개발의 논리에 밀린 우리사회의 변화상을 기록 중이다. 현재 서울사진학원의 강사로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인생이란 홀로 울고, 나와 남을 울리고 떠나야 하는 길이다. 생각하면 한 인생에서 곡절이 있을지언정 실패란 없다. 매년 12월8일이면 나는 만취한다. 그날이 내가 해고된 날이기에 노래 타향살이에 빗대 이렇게 읊조리곤 했다. “해고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공장 떠난 십여년에 청춘만 늙을 거~” 내가 의식의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본 나이 서른 초반에서 쉰 살을 너머까지 세상에 진 빚이라도 갚는 양 격하게 살아왔다. 1년 전부터 나는 내가 몸담아 왔던 곳에서 더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때가 온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우울증을 앓았다. 나는 내가 먼저 갈 줄 알았다. 그리 멀지 않는 곳에 공장을 두고 현정*이가 먼저 갔다. 어쩌랴! 우린 서로 어깨 기대며 살았으니, 그만하면 한 세상 잘 살았다. 해고살이 10년을 넘기면 공장 가는 길보다 저승 가는 길이 더 가깝다. 오늘도 누군가는 공장을 향해 발길을 내딛을 것이다. 그들은 밤하늘의 이름 없는 별로 살다가, 지하에서 소리 없이 흐르는 물처럼 스러져 갈 것이다. 내 사진은 이렇게 말한다. 메멘토 모리!

* 고 박현정 울산 효성노조 전 위원장, 2000년 11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2001년 울산 화섬3사 총파업으로 구속되어 해고. 2011년 2월1일 향년 48세로 타계.

자신을 소개해 달라. 어떤 소녀가 “우리 아버지는 새벽 5시에 나가 밤 10시에 들어오는데 아직까지 단칸방을 면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 때문에 내 동생이 집을 나갔어요” 하는 바람에 세상 똑바로 살자고 마음 고쳐먹고 노동운동에 뛰어 들었다가 해고된, 나이 쉰이 넘어 사진이 뭔지를 배우고 있는, 석달 전에 현역에서 은퇴한 해고 노동자다. 1977년에 한전에 입사했다가 1994년에 해고되고, 2011년에 은퇴했으니 공장생활 17년, 해고생활 17년을 한 셈이다. 그 사이 수배생활 2년과 감옥에도 2번을 갔다왔다.

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형들이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들어온 부조금 중 일부를 내게 주었다. 어머니가 주신 선물로 생각해, 오래 남길 게 뭔가를 생각하다가 카메라를 사게 됐다. 막상 카메라를 사고 보니 사진이 무엇인지 막막했고, 혼자서는 안 되겠다 싶어 부산의 다큐멘터리 사진가인 김홍희 선생에게서 사진을 배웠다. 그게 2009년이다. 처음 정한 주제는 ‘간이세금계산서’였다. 세상에는 편리하다는 이유로 쉽게 발행하지만 공인받지 못하는 ‘간이세금계산서’ 같은 일이 많이 벌어진다. 그 다음 주제는 ‘부재중 전화’였다. 소통은 간절한데 상대가 응해주지 않은 상황 같은 것이다. 어쩌면 세상이 부재 중일 때가 많다.

‘공장 가는 길’은 어떤 작업인가? 해고 노동자의 평생 염원은 원직복직이다. 더러는 공장에 들어가 일하는 꿈을 꾸다 놀라 깨기도 한다. 한 날은 공장에 너무 가고 싶어서 새벽녘에 차를 몰고 공장으로 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운전하면서 사진을 찍어야 하니 무거운 카메라로는 안 되고 똑딱이 카메라로 주로 찍었다. 어두운 새벽이라 ISO를 많이 올리는 바람에 사진이 많이 거칠어졌다. 그 와중에 박현정 동지가 급사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공장은 멀리 있지 않는데, 언제나 공장 문 앞에서 돌아서야 하는 해고 노동자의 처지를 생각하니 참 서러웠다. 세상에서 나를 끔찍이 좋아해주던 한 남자가 세상을 떠났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새벽 공장 길과 장례를 엮었다. 그리고 우리가 죽어도 누군가는 또 공장으로 발걸음을 옮길 거라는 생각으로 장례 끝나고 난 뒤 공장으로 향하는 장면을 덧붙였다.

온빛상에는 어떻게 응모하게 됐나? 김홍희 선생의 권유였다. 서울에서 ‘간이세금계산서’로 전시할 때 육명심 선생이 좋다고 하셔서 서울사진축제에 냈는데 미역국을 먹은 뒤론 출품 같은 건 안 하려고 했었다. 어쩌다 김홍희 선생에게 낚여(?) 내긴 냈는데 정작 투표하는 날 김선생은 아파서 못 왔다.(웃음) 홀홀단신으로 올라와 한 표도 안 나오면 서러울 거 같아 내 이름을 적어냈다.(웃음)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육명심 선생께서 내 손을 꼭 잡고는 “박선생이 일등이야. 혹 수상 못하더라도 자신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면서 나의 멘토가 돼주시겠다는 말씀에 즐거웠다. 좋은 자리를 마련해준 온빛사진상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린다.

박주석(54)은 사진 찍는 울산의 해고 노동자다. 2011년 5월 서울 갤러리 브레송과 6월 울산 영상아트갤러리에서 개인전 '간이세금계산서'를 가졌고, 2012년 1월30일부터 울산 영상아트갤러리에서 2주간 개인전 '공장 가는 길'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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