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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치명적 ‘하시시’를 사진에 녹이다

2012-07-20


사진을 본 순간 여러 가지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내내 입술만 달싹거릴 뿐, 그 어떤 표현도 쉬이 내뱉을 수 없었다. 시어를 찾아 떠난 시인의 애타는 마음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진부한 표현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순간, 작가의 이름을 듣고는 무릎을 쳤다. ‘하시시’. 이제껏 찾던 그 표현이 작가의 이름이란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딱 맞아 떨어진 그 이름은 명확한 뜻을 떠나 느낌만으로 이해되는, 그야말로 ‘하시시한’ 것이었다.

글│현정아 기자
기사 제공│월간사진

본명 박원지(30) 외에 ‘글로벌한’ 이름을 찾던 중 인도여행에서 만난 일본친구의 발음을 따라 대마초의 한 종류인 ‘하시시’로 짓게 됐다는 그녀는 현재 개인 사진작업과 앨범커버, 제품사진 등을 찍고 있으며 이밖에도 동영상, 뮤직비디오 등을 제작하고 있다.

하시시박의 사진을 처음 접한 것은 인디밴드 ‘얄개들’의 앨범커버에서다. ‘그래, 아무것도 하지 말자’라는 앨범타이틀과 딱 들어맞는 무기력한 분위기, 나무늘보처럼 축 매달려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던 멤버들의 모습 속에는 이미 그들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세련된 디자인으로 중무장한 앨범재킷들을 오히려 초라하게 만들었던 이 사진의 힘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필름카메라 특유의 느낌이 자아낸 개성이었을까, 포장에 포장을 덧댄 세련된 아이들 틈에서 찾아낸 ‘날것’에 대한 반가움이었을까. 사진과 함께 ‘하시시박’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필름’을 사랑한 소녀

17살 때 홀로 인도여행을 떠났다고 들었다. 17살의 박원지는 어떤 소녀였나?
공부를 하고 싶었던 평범한 소녀. 정말 그랬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한창 교권붕괴가 시작되고 있던 터라 교실 안은 늘 쑥대밭이었다. 공부를 떠나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 어른에 대한 예의 등 아주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윤리마저 통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그 상황들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1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자퇴했다. 그후 잠깐의 여유를 틈타 인도여행을 다녀왔다. 언젠가 역사책에서 타지마할을 본 이후 막연히 동경하던 곳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혼자 해외여행을 다니곤 했기 때문에 딱히 두려움은 없었다.

당시 꿈은 무엇이었나?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 같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펄프픽션’(Pulp fiction)을 보고 충격을 먹은 뒤로 무작정 영화감독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영화 보는 걸 좋아했는데 그때만 해도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컴퓨터로 쉽게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국내에 일본영화도 걸리지 않았을 때였다.

그래서 혼자 인디영화관에 다니거나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만든 온라인 클럽을 통해 영화소식이나 정보를 얻곤 했다. 딱히 한 장르에 꽂히기보다는 구분 없이 ‘웰 메이드’ 작품이면 가리지 않고 본다. 이후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한 후 런던필름스쿨에 진학하게 됐다. 지금도 사진과 함께 꾸준히 동영상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한창 영화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사진을 찍게 된 이유는?
처음부터 상업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내가 진학한 런던필름스쿨의 커리큘럼이 거의 상업영화 위주였다. 마음을 접고 학교를 그만둘 즈음 처음으로 사진작업 의뢰가 들어왔다. 평소 스냅사진을 찍곤 했었는데 내 사진을 본 런던의 바이스매거진이 연락을 해온 것이다. 당장 장소부터 모델 섭외까지 혼자 해야 했기에 무척 막막했다. 친구가 일하던 카페에 항상 앉아있던 노숙자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그 분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내 사정을 말하니 대뜸 자신의 집에 나를 초대하는 게 아닌가. 노숙자가 집이 있다니,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따라나서니 웬 남산아파트 같이 생긴 건물 안에 다양한 출처의 옷들이 한가득이었다. 노숙자 할아버지의 표현처럼 그야말로 ‘Crazy’했던 그 장소에서 재밌게 촬영한 후 만족스럽게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비록 화보로는 출간되지 않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정식으로 사진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줄곧 필름카메라를 쓰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요즘은 지면의 성격에 따라 DSLR로 촬영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했던 작업들은 거의 필름작업이었다. 사실 디지털의 깊이감을 좋아하지 않는다. 디지털 자체를 거부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디지털카메라로 찍으면 어떤 상을 보더라도 렌즈를 통해 걸러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 눈과 사물 사이에 무언가 끼어있다는 느낌이랄까. 반면 필름카메라는 사물과 나 사이에 어떤 막도 존재하지 않고 1:1로 마주한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지만.

하지만 의뢰받은 일과 관련해서는 내 고집을 세우지 않는 편이다. 최근 작업은 처음으로 DSLR로 촬영하기도 했다. 잡지의 경우는 판형이나 종이의 질이 모두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필름으로 작업한 사진이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런 화보라면 굳이 필름을 고집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전 회의 때 기꺼이 타협(?)을 감행했다.

하시시박의 ‘개성’을 주문하다

작업스타일이 뚜렷하다. 클라이언트와 관계는 어떤가?
앞서도 말했지만 내 작업이 아닌 의뢰받은 일은 고집을 세우지 않고 그쪽 의견에 99퍼센트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내게 의뢰한 분들 대부분 평소 내 작업을 좋아해주신 분들이어서 “그동안 찍던 대로 해주세요”라고 요구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내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충돌 없이 작업할 수 있었다. 다만 필름작업을 하다 보니 촬영 후 모니터로 확인할 수 없어 클라이언트들이 조마조마해할 때가 있다.(웃음)

앨범재킷사진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비트볼레코드사에서 기존에 찍어온 내 사진을 소속가수의 커버로 쓰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그때 연이 닿아서 몇차례 일을 하게 됐고 ‘얄개들’ 앨범재킷사진까지 찍게 됐다. 마찬가지로 SM엔터테인먼트의 의뢰로 f(x)의 ‘NU ABO’ 앨범재킷 촬영도 하게 됐다. 재킷을 찍을 당시에는 노래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SM엔터테인먼트처럼 큰 소속사 같은 경우는 워낙 기획이 철저해서 오히려 큰 어려움 없이 콘셉트 회의를 마쳤던 것 같다.

상업사진은 사진가의 개성이 드러나기 어려운 구조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중들이 원하는 사진이 명확해서다. 자연히 매체에서 대중이 좋아하거나 잘 팔릴 만한 사진을 고르게 되고 결과적으로 비슷한 느낌의 사진만 남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떠나 패션계에서 일하고 있는 사진가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화보를 진행하는데 사진가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생각보다 굉장히 짧다. 기획이나 장소헌팅 등을 다 합쳐 이틀도 안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4~5일이면 오히려 많은 편이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과 살인적인 스케줄을 매달 몇 개씩 해내는 분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상업사진가들처럼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활동할 생각은 없나?
국내 에이전시가 구체적으로 어떤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에이전시는 작가 개인의 스타일을 존중하고 그에 맞는 작업을 하도록 하게 하는 곳인 것 같다. 그런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진 곳이 아니라면 굳이 소속되고 싶지 않다.

사진은 ‘가족’, 동영상은 ‘연인’

개인작업은 주로 어떤 주제인가?
애초에 주제를 잡아놓고 작업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예전에는 이런 점이 불안하기도 했지만 막상 찍다보면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 당시 내가 느끼고 있는 것들,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찍히는 것 같다. 그러다보면 일관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Korean country life’ 시리즈도 주제를 미리 잡아놓고 시작한 작업이 아니다. 그동안 찍어온 사진을 통해 내 안에 한국 시골풍경에 대한 흥미가 있다는 걸 발견했고 그런 사진들을 모으다보니 하나의 시리즈가 완성된 것이다. 평소에는 주로 스냅사진으로 주변사람들을 찍으며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동영상으로는 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있나?
주로 패션필름이나 메이킹필름 작업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다큐멘터리를 찍기도 하고 최근에는 신인가수의 뮤직비디오도 촬영했다.

사진이 가족이라면 동영상은 마치 연인 같은 존재다. 그야말로 애증의 관계라고나 할까. 밤새 컴퓨터 모니터와 단 둘이 마주앉아 동영상 편집을 하고 있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가도 묘한 매력에 중독돼 도무지 헤어나올 수가 없다.(웃음)

여러 작업을 병행하며 어려운 점은?
매번 어렵다. 하나에서 열까지 혼자 다 해내고 책임져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지만 각 작업마다 밸런스를 맞추는 일도 어렵다. 의뢰받은 일과 내 개인작업의 구분이 사실상 없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확고한 기준을 잡고 중심을 잡을 필요가 있다. 또 매번 내 개인작업처럼 생각하고 작업하려다보니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 때가 많다.

앞으로 어떤 아티스트가 되고 싶은가?
고민 중이다. 다만 지금처럼만 계속 작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전업작가가 됐든 상업작가가 됐든 이 일로 먹고 살 수 있다면 그게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 생각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다. 계속 고민하면서 큰 목표를 가져보려 한다. 이제 30대에 접어들었으니 차분하게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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