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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하찮은 것들의 귀환

2013-02-04


등신대 크기가 넘는 사진작품 속에서 망치와 ‘빠루’가 못에 단단히 결박되어있다. 못을 박아오던 망치가, 못을 빼오던 빠루가 못들에 제압당한 사진은 단단한 권력의 결박이나 해체 등 중의적인 의미를 내뿜는다. 속시원한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그럼 이 못들을 박은 망치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하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계속 되풀이되어온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언론권력의 쇼. 그리고 매번 이것에 속아 넘어간 민중들의 관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환호는 탄식으로 바뀌고, 허탈감으로 주저앉는다.

기사 제공│월간사진

박불똥(57, 본명 박상모)은 80년대부터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활동해왔다. 신학철, 임옥상, 이종구, 오윤, 주재환 등과 함께 분단과 독재,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점들을 적나라하게 비판해온 그는 특히 사진콜라주 작업방식으로 유명하다. 80년대 초반부터 일기 시작한 민중미술은 현실비판적인 작품내용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현실참여와 진정성이란 태도의 고민을 가져왔고, 표현형식에서도 키치와 교류하거나 복제, 콜라주, 극사실화 등 다양한 방식을 양산해냈다. 이처럼 민중미술은 모더니즘의 끝자락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기에서 가교의 역할을 한 수많은 작가와 비평가들을 배출해냈다.

이중 한명인 박불똥은 민중미술의 관점을 잃지 않으면서 여전히 유머와 울림이 큰 문제작들을 발표해왔다. 지난해 10여년 만에 가진 2번의 개인전에서 그는 회화와 사진으로 여전히 녹슬지 않은 감각을 확인시켰고, 서울 소격동의 트렁크갤러리에서 주변의 쓰레기나 하찮은 사물들을 찍은 사진전 '못-쓸-것'을 열었다. 특히 '못-쓸-것'전은 색을 다루는 화가 특유의 색감각 그리고 예술과 현실 사이, 녹록치 않은 작가로서의 삶이라는 서사적인 담론을 작품 속에서 간단명료하면서 철학적인 깊이를 보여주는 사진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작가가 ‘유목민’이라고 제목 붙인 다 삭은 알루미늄 캔, 보증을 잘못 서서 집을 압류 당했을 때 산길에서 주운 헝겊아기신발 ‘Happy Baby’, 날개만 남은 죽은 호랑나비 ‘Butfly 7’(but+fly 즉, 날지 못하는), 십자 홈이 뭉그러져 버려진 위대한 발명품 ‘NASA’ 등은 모두 작가의 의미부여와 작명으로 예술작품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또한 이들은 하나같이 작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자화상이면서 ‘쓸 것’과 ‘못 쓸 것’ 사이, 예술이 대상으로 삼는 주제에 대한 전복을 꾀하고 있다.

“지난 날 엄연한 ‘쓸 것’이었으나 세월의 침식으로 이제 하등 ‘못 쓸 것’이 되고만 이 세상 모든 자질구레한 인간, 사물, 사건, 일 등에 대한 관심의 이해의 애정의 존중의 끝내는 존경의 헌화이다. 더 소박하게는 내가 나를 쓰다듬는 자위의 손길이다. 쓴 입맛으로 혼자 나지막이 부르는 콧노래 같은 것이다. 세상은 쓸 것을 지향하고 ‘못 쓸 것’은 지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주의 궁리가 과연 쓸 것의 천국으로 귀결될는지? ‘못 쓸 것’ 천지에 종착하지 않을는지? 인류의 역사를, 쓸 것에서 ‘못 쓸 것’으로 흘러옴 또는 흘러감의 역사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물론 내 어쭙지않은 소견이지만.” 시니컬하게 언급된 작가노트에서 세상과 예술, 삶에서 겪은 시련의 흔적과 그럼에도 천진난만한 박불똥의 미학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예명에는 자본주의와 권력의 속성을 ‘박’터지게 성찰하고 ‘불똥’ 튀게 임하겠다는 뜻이 담겼다. 이제 그의 시선은 자신과 주변의 못 쓸 것이 돼버린 물건들로 옮겨왔다. 세상에 낄 자리조차 없는 미약하고 하찮은 존재들이 예술작품으로나마 영원히 ‘쓸 것’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진 매체를 처음 활용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인가?
미술대학 3학년 때부터다.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이 늦어진 데다 병역까지 마치느라 남들보다 5년 늦게 대학을 다녔는데, 미대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내용이란 게 내가 태어나서 보고 자라온 세계와는 너무 이질적이었다. 물론 전문성 연마라는 점에서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작품에 미술 외적인 어떤 메시지를 담아보려는 발상이나 시도 자체를 불온시하는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 미술로는 나를 표현할 수 없다는 판단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할 뻔했다가 대학 바깥에서 때마침 일기 시작한 새로운 미술 경향(민중미술)을 접하게 됐다. 미술평론가 김윤수 선생이 관장을 맡은 구기동 서울미술관에서 82년부터 매년 초에 개최한 <문제작가전> 이 큰 자극을 줬다. 신학철의 첫 개인전에서 그 유명한 한국근대사 시리즈 작업을 본 것도 그 즈음이었고. 앞서 성완경, 최민, 윤범모 등 비평가들의 주도로 결성된 창작동인 ‘현발’(현실과 발언)이 화단의 주류세력과 난상토론을 벌이는 등 에너지가 넘치던 시기였다. 그때쯤 학교로 다시 돌아왔고 그림보다 사진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민중미술에서 취한 사진콜라주 작업방식은 단순히 작업방식으로서의 의미를 넘어서 정치색 짙고 기존 방식의 전복을 의미하는 것 같다. 사진 콜라주로 작업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정치색 짙은 사진콜라주나 포토몽타주는 그 연원이 1920년대 베를린다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우리나라에서 그 기법을 본격적으로 활용한 최초의 작가는 신학철 선배가 아닌가 싶다. 그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일상생활 속에 범람하는 인쇄매체의 사진이미지들을 재활용해 물감 대신 직접 오려붙이는 사진콜라주 방식은 단순히 회화작업의 참고자료로 사진을 이용하는 것과는 미학의 본질부터가 다르다. 가령 작품 한점을 완성하는데 수십일의 엄청난 공력이 들어가는 극사실회화(Hyperrealism)는 그 형식의 완성도에 비해 주제의식이 싱거울 정도로 단순하다는 사실을 환기해보면 기민성과 메시지 전달력에서 사진콜라주는 그야말로 탁월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1980년 광주’로 상징되는 당시 정치상황에 나름 대응하기 위해 반(反) 예술을 자처하고 각오한 선택이었다.

직접 찍은 사진으로 콜라주를 시작한 건 1989년의 '결사반대'전부터였다. 어떤 전시였는가?
전두환의 강권정치에 이어 등장한 노태우정권은 수도권의 중산층을 겨냥해 주택 50만호 공급을 약속하고 5개 신도시건설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일산읍 후곡리에 세입자로 살고 있었는데 일산, 분당, 산본, 중동, 평촌 5개 예정지 가운데 일산이 반대투쟁이 가장 심했었다. 한강하구의 일산평야는 600년 전부터 농민들이 지게로 흙을 퍼날라 만들어진 간척지였다. 절대농지라는 개발제한에 묶여 재산권 행사 등의 불이익을 오랜 세월 감내하며 살아온 농민들로서는 헐값에 농지를 강제 수용한다니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산신도시 백지화투쟁 과정에서 농민이 5명이나 농약을 마시거나 목을 매 자살하고 해방 이후 처음으로 경의선 열차가 멈춰서는 등 사태가 악화되자 국회에서 진상조사단이 현장에 나왔었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은 보도진 앞에서 사진 찍히는 것에 더 신경 쓰는 것 같았고, 언론사 기자들은 주민들을 거의 짓밟다시피 하며 취재에만 열중이었다. 국회 국정감사장에서는 ‘농민들의 자살원인이 신병을 비관하거나 농가부채 때문이지 신도시 건설과는 무관하다’고 보고한 건설부장관의 답변이나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마치는 여야 국회의원들의 형식적인 태도가 참으로 가관이었다. 모든 게 쇼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보상지가조정 등의 회유작업을 통해 반대세력은 급속히 해체되었고, 끝까지 버티는 가옥들을 고립시키는 토목공사가 시작됐다. 남은 집이나 이장 안한 무덤 주변을 파들어가는 식이었는데 나중에는 여기저기 집 한채, 무덤 한기씩이 마치 망루처럼 10미터쯤 높이에 덩그러니 올라앉은 진풍경이 펼쳐졌다. 그런 현장들을 돌아다니며 거주민으로서 기록사진을 찍었고, 그것들로 사진콜라주 작업을 해서 선보인 개인전이 1989년의 '결사반대'전이다.

역사에서 하찮게 취급된 사건, 인물들에 주목해왔다. '못-쓸-것'전 역시 이런 점에서 비슷해 보인다.
일산신도시 반대투쟁은 어쩌면 전체 역사 속의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와 같이 자질구레한 사건들이 역사 속에는 무수히 많고, 그 와중에 억울하고 분하고 이름 없이 쓰러져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잊혀져간 사연을 전혀 모른 채 그 현장 위에서 저마다 자기 자리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에 남는 건 큰 사건, 힘 있는 자들의 생애뿐이다. 그러나 기록도 없이 하찮게 사라졌을지라도 그 생의 당사자에게는 그것이 전부이다. 결국 그림이든 사진이든 그런 것을 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세상이 널리 주목하고 다 아는 것을 굳이 나까지 찍고 그릴 필요가 있을까. 주류가 놓치고 비켜간 부분을 포착해 색다른 의미부여를 시도하는 작업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측면은 작고 버려진 것과 나를 점차 동일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다소 막연하던 시각이 나이가 들면서 보다 선명해진 느낌이다. 게다가 거주지가 서울에서 경기도로, 다시 또 지방으로 밀려나는 이사 경험 덕분에 갈수록 하찮은 것이나 못쓰게 된 것들이 꼭 내 모습, 자화상들 같아서 애잔하고 더욱 애착이 간다.

표현에서는 과거의 노골적인 방식보다 해석의 여지를 남기면서 내면으로 들어온 듯하다.
일상생활에서야 정치적인 견해나 태도를 여전히 뚜렷하게 밝히겠지만 작품을 통해 세계관이 공개되는 지점에서는 이전과 달리 나를 스스로 보호할 필요성도 있다고 본다. 작가는 모름지기 동시대의 고통을 끌어안고 가야하는 존재이다. 민주화 열기가 급박하게 몰아치던 80년대의 사회상황에서는 ‘깃발’과 ‘타깃’이 명확했고, 그런 현실을 반영해 딱 부러지는 표현이 요구됐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로 재듯 호오와 시비를 엄격하게 구분 짓기가 아주 어려운 시대이다. 삶의 애환, 그 작은 에피소드들에 깃든 인간들의 여러 속성과 욕망 이런 것들을 소처럼 되새김질하거나 짐짓 게으른 듯 해석의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더 다양한 반응과 관심을 유도하고 싶다. 예컨대, 트렁크 전시작품 중 ‘Road 1’은 못의 뒤통수를 치던 망치가 거꾸로 그 못들의 반란으로 제압당해 그만 ‘못 쓸 것’이 되고만 지경을 연출하고 있는데, 그 상태 더 너머의 어떤 것까지도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 못들을 타격해 박았을 또 다른 망치에 대해.

올 12월에 지난 30년 동안의 작품활동을 정리해 작품집을 낸다고 들었다. 책에 관한 소개와 지금 30년의 활동을 정리하는 것이 작가로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서울문화재단의 중견작가 작품집 발간지원금을 받아 300쪽짜리 단행본을 출판사 현실문화연구에서 낼 예정이며, 현재 자료를 정리하는 중이다. 흔히 말하는 화집과는 거리가 멀다. 화가 또는 작가의 ‘아우라’를 북돋우고 광고치는 성격보다는 ‘박불똥’을 까발려 알몸을 보여주는 ‘자뻑성’ 앨범을 의도했다. 쪽팔림은 순간이고 출판물은 좀더 길이 보존될 것이므로 고심 끝에 그렇게 결심했다. 만일 30년의 활동 이후에도 계속 살아남는다면, 그 작품집을 ‘딴 길로 가기 위한 이정표’로 삼고 싶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쓸모 있는 예술가란 어떤 사람인가?
동시대의 언어를 터득하고 동시대의 문제를 건드려 동시대의 공감을 얻어내는 예술가가 되기란 굉장히 어렵다. 역사, 철학, 문학 등 많은 분야의 공부가 필요하고, 밑바탕에 깔린 게 많아야 한다. 현실은 정치적인 것만이 다가 아니다. 내 자신이 꽤 쓸 만한 예술가는 아니더라도 ‘못 쓸 것’을 ‘쓸 것’으로 환원하고 부활시키는, ‘못 쓸 것’으로 끝나지 않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미술시장에서 살아남는 작가인지 아닌지 그건 또 다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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