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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고택 속 깃든 나눔과 베풂의 정신

2013-05-27


경북 안동의 고성 이씨 대종택. 현존하는 우리나라 살림집 중 가장 큰 규모로 5백년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99칸의 대저택 중 지금은 75칸만이 남았고, 종택 앞마당에서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철로가 놓여있다. 9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항일 명문가 집안에 대한 앙갚음으로 일제가 놓은 철로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은 나라가 없어졌는데 종가를 지켜서 뭐하냐며 8촌까지 집과 땅을 모두 팔도록 해서 만주로 떠났다. 종손을 따라나선 고성 이씨 일가들은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했고, 몇 안남은 후손들이 지키는 종가는 지금도 일제가 놓은 철로변 옆에 위태롭게 서있다.

300년 전에 쓰여진 요리서인 ‘규곤시의방’(음식디미방)이 전해지는 안동 장씨 가문은 봉제사 접빈객으로 유명하다. 이 집안의 종손인 장성진씨는 불천위(큰 공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사대봉사 후 내리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 지내는 신위)제사를 포함해 1년에 14번의 제사를 올린다. 당뇨병으로 손가락 한마디를 절단한 후에도 직접 농사지은 재료로 손수 제사 음식을 장만한다. 밤, 대추, 땅콩, 호두, 다식 5가지 고임상을 차려내는 일은 대대로 종손의 몫이었다. 30여 층으로 괴어 올리는 땅콩고임의 경우 완성하기까지 꼬박 사흘이 걸린다.

12대에 걸쳐 5백년간 부와 명예를 유지해온 경주 최부자집은 해마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제사와 함께 두 노비의 제사도 따로 올린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전사한 정무공을 마지막 순간까지 보필하다 목숨을 잃은 ‘기별’과 ‘옥동’ 두 노비를 기리는 제사다.

기사 제공│월간사진

노블리스 오블리제 실천해온 한국의 종가
요즘이야 웬만한 큰집과 맏이라면 쉽게 종가와 종손이라고 말하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종가는 시조부터 10대 이상은 내려와야 한다. 짧게 잡아도 3백년의 긴 시간동안 한 집안이 대를 이어오기 위해서는 재산이 많다거나 또는 내 집안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돌본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정(情)과 마음으로 웃어른을 섬기고, 의로움과 예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아 나눔과 베풂을 실천해온 종가만이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종가문화의 중심에는 종가와 종손이 있었다. 종손은 집안의 최고 결정권자이며 정신적인 리더이다. 세간의 욕망에 등 돌리고 의로움의 실천과 조상에 대한 도리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종손은 한 집안의 명운을 좌우했다. 그만큼 종손은 중요한 존재였고, 따라서 예로부터 어린 종손의 교육은 특별히 사돈집에 맡겨 어려운 관계에서 엄한 교육을 받도록 했다. 또 책임감과 함께 종손의 결정에는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도록 하는 등 권위도 부여했다. 이렇게 해서 수백년의 시간이 흘러도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여겨지는 종가의 문화와 전통이 보존될 수 있었다.

교류와 소통 지향하는 종가문화
한국의 종가와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가 유럽에서 열린다. 지난 2월12일부터 3월31일까지 헝가리 부다페스트 주 헝가리 한국문화원에서 열리는 이동춘(53)의 사진전 <선비정신과 예(禮)를 간직한 집, 종가> 전이 그것이다. 이번 전시에선 지난 2007년부터 작업한 안동의 종가 사진만을 골라 67점이 소개된다. 이동춘은 지난 80년대 후반에 잡지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일하면서 사진가 주명덕과 고 김대벽의 뒤를 이어 한옥을 소개하는 연재를 맡아 한옥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프리랜서 사진가로 독립하면서 겉으로 보이는 단아하고 정갈한 한옥 사진에서 한옥으로 대변되는 우리의 정신과 문화로 카메라의 포커스를 옮기게 되었다. 자신의 사진을 찍고 싶다는 열망에 이끌려 한옥의 속살에 한발 더 다가섰고, 그곳에서 선조의 삶과 이를 지키려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의로움과 나눔을 실천해온 옛사람의 이야기에 절로 숙연해져요. 그리고 이들을 기리며 예는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묵묵히 지키고 행하는 후손의 모습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한옥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이들의 정신과 마음가짐이라고 느껴요.”

고리타분한 겉치레로만 치부할 때는 안타까움도 컸다. 그럴수록 더욱 종가의 문화와 예절, 의식주 문화의 정점인 한옥의 건축미학 속에 담긴 선조들의 정신과 지혜를 올곧이 담아내기 위해 촬영에 전념한다. 지금이야 안동을 내 집처럼 드나들게 됐고 기록으로 남길만한 대소사가 있으면 미리 연락을 해오지만 여성의 몸으로 처음 종가의 문턱을 넘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고, 그런 뒤에야 쉽고 편리한 삶 대신 고집스럽게 전통을 고수해오는 어르신들의 지난하지만 자긍심 있는 삶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종가는 종손 혼자서 지키는 게 아니에요. 제사와 음식, 건축 등 모든 것이 교류와 소통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좁게는 한 집안 사람들, 넓게는 우리 사회 모두가 관심을 갖고 보존하지 않으면 온전한 형태로 지켜질 수가 없어요.” 이동춘은 지난해 베를린 전시에 이어 두번째 헝가리 전시를 갖는 등 국제적으로도 한국의 종가문화와 정신을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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