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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서귀포 연가를 들려줄게

2011-11-14


구술 | 김옥선
정리, 사진 | 포토라이터 이상엽



제주에 대해 : 참 멀다. 어찌 살고 있나?

1995년에 이곳으로 왔으니 이제 15년째 됐다. 제주시에서 6년을 살았고, 지금은 서귀포에 살고 있다. 제주시에서 살 때만해도 그리 못 느꼈는데 서귀포로 오고는 정신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이제 서울에서 참 많이 떨어졌구나’ 했다. 나는 원래 서울 사람이다.

한 달에 한번 정도 서울에 다녀온다. 며칠 부모님 집에 머물며 찐하게 사람들을 만난다. 그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을 만나는 것이 꽤 시간 뺏기는 일이구나. 조용하게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한다. 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하고 보니 더욱 그렇다. 요즘은 이곳에서도 사람 만나느라 바빴다.

내가 내성적인 탓도 있겠지만 제주도에서 섞이기 힘들다. 이곳에 친구가 별로 없다. 독일인 남편도 그렇고. 오히려 딸이 제주도 사람이다. 우리는 딸에게 사투리를 배운다. 지방색을 갖는다는 것은 양면적이다. 좋은 것도 있지만 불편한 것도 있다. 사진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서울을 드나들지만 작업 자체는 지방색이 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국제결혼한 커플을 찍은 ‘해피투게더’는 서울과 제주에서 작업한 것인데 결과물을 놓고 보자면 제주 작업이 더 좋았다.


작업에 대해 : 사진은 어찌 찍나?

흐리고 찌뿌둥한 서귀포의 날씨는 독일을 닮았다. 나는 4×5인치 린호프 필드용 카메라를 사용한다. 대형카메라이긴 한데 혼자 작업한다. 주변에 비슷한 처지의 사진가들이 조수를 데리고 다니기도 하던데, 나는 그럴만한 처지는 아니다. 학교(제주관광대)에서 강의도 하는데 조수로 채용할 만한 아이가 없다. 계속 사진을 하려는 친구들은 뭍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작인 ‘함일의 배’는 제주에 온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왜 풍경을 찍지 않느냐는 주변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처음에는 제주도가 ‘나를 배척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풍경이 안보였다. 그런데 제주에 온 외국인들을 모델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니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제주의 풍경이 들어왔다. 어떤 곳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외국인들이 찾아낸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내게는 사람이 있는 풍경이다. 사람을 잘 못 사귀고 무심하고 냉정하게 보이는 내가 아이러니하게도 풍경 속에 사람이 존재하는 것에 천착한다.

그런데 얼마 전 미술가 강요배의 동굴 그림을 봤다. 제주 4.3 당시 그 동굴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어두운 동굴 안으로 빛이 비쳐드는 그림에서 생각지 못한 감정이입을 경험했다. 인물-커뮤니케이션이라 생각했는데 순수 자연도 이렇게 표현이 가능하구나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는 앞으로 작업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대형 사진에 대해 : 그렇게 큰 포맷이 잘 맞나?

전에는 6×6센티미터 포맷의 핫셀블러드를 사용했는데 너무 인물에 집중하는 것 같아 바꿨다. 또 4×5인치 대형을 사용하면 실물 사이즈로 확대할 수 있다. 대형 카메라를 불편하거나 힘들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들고 다니기도 쉽고 다루기도 편해서 좋다. 무브먼트를 자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도 빠르고 많이 찍는 편이다.

얼마 전까지 사용하던 호스만은 ‘함일의 배’ 작업 때 절벽 바위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그래서 최근에 구입한 것이 조금 더 튼튼한 린호프였다. 지금까지는 표준과 광각으로만 작업을 했는데, 조금 더 전통적인 인물사진을 찍기 위해 망원이 필요하게 됐다. 전에는 너무 들어가는 사진이 싫어 빠져나왔는데, 다시 들어가고 있다. 나이에 따라 달라지나 보다.


인연에 대해 : 어쩌다가 사진을 하게 됐나?

85년, 숙명여대에 입학해 학회운동도 하고 학보사 기자도 했다. ‘숙미회’라고 사진동아리에 들어갔다. 사실 그때는 그렇게 유명한 동아리인지 몰랐다. 정기전시라도 할라치면 졸업한 선배들이 나타나 크리틱을 했는데, 사진이 이게 뭐냐며 프린트를 찢기도 했다. 그리고 전시가 있는 날이면 대머리아저씨 한 분이 나타나 한마디씩 거들었는데, 바로 주명덕 선생이었고 당시는 그렇게 유명한 사진가인지도 몰랐다. 하여간 선배들 덕분에 독일에서 갓 돌아온 구본창 선생도 특강 강사로 오곤 했다.

대학 시절 내내 데모도 열심히 하고, 사회에 대한 공부도 참 많이 했다. 졸업하고는 잡지사에 들어가 사진기자 노릇을 했다. 그런데 잡지사가 1년 만에 폐간하는 바람에 무역회사에 들어가 인도와 유럽을 오갔다. 이때 한국의 샤먼에 대한 기록영화를 찍으러 온 남편을 만났다. 서울과 독일을 오가며 연애를 하다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살 곳으로 서울도 함부르크도 아닌 제주도를 선택했다. 물론 남편이 제주대학교에 일자리를 얻었던 탓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몇 해만 살겠지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고 있다. 독일 사람들은 바다를 잘 몰라서인지 섬에 대한 환상이 좀 있다.

이 무렵에 홍익대 대학원에 입학해 사진을 전공했다. 성낙인, 김대수, 홍순태, 육명심, 김승곤 선생께 강의를 들었다. 졸업을 해야 했던 96년은 정말 최악이었다. 일반인 여성들의 누드를 가지고 졸업전을 준비했다. 벼룩시장에 광고를 내서 모델을 찾았다. 결혼하면서 챙겨뒀던 300만원이 모델료로 몽땅 나갔다. 결국 대학로 샘터스페이스에서 이라는 이름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요즘 말로 대박이었다. 별별 남자들이 다 구경을 왔다. 그래서 혹시나 경찰서에 끌려가는 것 아닌가 했다. 풍기문란으로 말이다. 그렇게 5월에 전시하고, 6월에 졸업논문 심사하고, 7월에 출산했다.


성공에 대해 : 그 후로 잘 풀렸나?

어디서도 콜이 없었다. 그러면서 이러다가 아줌마 되는 것 아닌가 했다. 너무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최봉림 선생이 기획했던 전시에 최광호, 이선민 등과 참여해 국제결혼을 한 커플을 담은 ‘해피투게더’ 연작 일부를 걸었다. 이때부터 4×5인치 카메라를 사용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대안공간 풀의 박찬경씨가 누드작업으로 개인전을 제안했는데 거절했다. 아직 젊은데 회고전 하는 것도 아니고, 새 작업으로 전시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해인 2002년에 두 번째 개인전 <해피투게더> 가 발표됐다. 당시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도 있었고 국제결혼이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았다. 하여간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이때쯤 심각한 고민을 해야 했던 제안이 있었다. PS1(미국 현대미술관과 연계된 작가 레지전시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뉴욕에 1년간 머무를 기회가 생긴 것이다. 남편은 반대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매장되는 듯한 기분이었을 때, 나는 가야했다. 결국 애는 친정에 맡기고 갔다. 굉장히 많이 배우고 즐겁고 보람 있는 한해였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작가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작가적인 태도를 봤고, 아이디어를 어떻게 시각화 하는지를 배웠다. 여기서 ‘해피투게더’의 뉴욕판인 ‘You and I’를 완성했다.


인생에 대해 : 요즘은 살만한가?

2005년 귀국 전시 이후로 미술관 등에서 내 사진을 사기 시작했다. “야 이게 PS1의 힘이구나” 했다. 그런데 슬럼프라 해야 하나. 여기가 혹시 나의 ‘정점’ 아닌가 싶었다. 불안감이 많았다. 2007년 ‘다음작가상’을 받으면서 울었다. 주변에선 “저 여자 왜 저렇게 우나” 했을 것 같다. 아마도 그때 내 마음이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40살에 그런 상을 받았기에 이제 중견작가로서 ‘뭔가 전환점이 되는 작업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제주도에 찾아온 외국인들의 모습을 담은 ‘함일의 배’이다. 당시 1,500장 정도를 찍었던 것 같다. 뭔가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정말 많이 찍었다. 그 사진 중 60컷을 골라 책에 담았고 전시를 했다. 최선을 다한 작업이라 정말 기분이 좋았다. 나름 반응도 좋았고.

하지만 여전히 먹고사는 것? 재생산도 어렵다. 지금까지 아트뱅크, 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구매했지만 한번 구매하면 끝이다. 새 작업이 나와도 안 산다. 지방미술관은 관심이 없고, 개인은 컬렉션하기 힘들다. 이제는 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기대해 보지만 신진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이제는 힘들다. 그래서 ‘해외시장을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뭐, 당장 어떤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하면 풀리지 않겠나? 지금까지도 잘해왔다고 생각한다.




이번 취재를 위해 바다너머 비행기를 타고 갔다. 김옥선씨가 서울에 왔을 때 인터뷰할 수도 있었지만 늘 오름 어딘가에서 대형카메라를 세워두고 작업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한 후로 나는 제주에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주는 멀었다. 반년 전부터 가겠다는 약속이 이리도 늦어졌다. 강추위가 몰아닥친 서울을 피해 도착한 제주는 봄처럼 푸근했다. 그리고 나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늦은 오후에 오름 근처에서 작업하는 그녀의 모습을 찍었다. 얼추, 나의 선입견은 카메라에 담겼지만 정작 김옥선씨의 진정성은 이틀 동안의 대화에서 발견됐다. 왜 그녀의 작업이 어려운 듯하면서 쉬울 수 있는지, 예술처럼 보이지만 기록으로 의미 있는지. 바로 그녀 삶의 이야기에 해답이 있었다.


김옥선은 1967년 서울 출생으로 1989년 숙명여대 문과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1996년 홍익대 산미대학원 산업디자인학과 사진디자인과를 졸업했다. 2007년 6회 다음작가상을 수상했고, 2003년 한국문예진흥원이 후원하는 PS1 국제스튜디오프로그램 펠로우 쉽을 수상했다. 개인전으로는 2009년 'Hammel''s Boat'(리씨갤러리 윈도우, 서울), 2008년 'Hammel''s Boat'(금호미술관, 서울/제주현대미술관, 제주), 2007년 'Happy Together'(아트 스페이스 C, 제주), 2005년 'You and I'(마로니에 미술관, 서울), 2004년 'Happy Together'(뉴욕한국문화원 갤러리 코리아, 뉴욕), 2002년 'Happy Together'(대안공간 풀 사진초대전, 서울), 2000년 'Woman in a Room2'(타임스페이스, 서울), 1996년 'Woman in a Room'(샘터 갤러리, 서울) 등을 가졌다. 2009년 'Chaotic Harmony'(휴스턴미술관, 미국), '네 개의 방법'(가디언 가든, 일본), '마그네틱 파워'(코리아나 미술관, 서울), 2008년 '대구사진비엔날레 주제전'(대구 엑스코, 대구), '한국현대사진 60년전 1948-2008'(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박하사탕 : 한국현대미술중남미순회전'(부에노스아이레스국립미술관, 아르헨티나 / 2007년 산티아고 현대미술관, 칠레)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사진집은 ‘Hamel''s Boat, Kim, Oksun’(2008, 박건희문화재단), ‘Happy Together, Kim, Oksun’(2006, 도서출판 디웍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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