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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창조의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제3의 공간’

레이 올덴버그 | 2014-03-17


올 초, 뉴욕 퀸즈 플러싱에 있는 한 맥도날드 햄버거 매장에서 한국 노인들이 오래 앉아있는다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는다는 소식이 보도돼 화제가 되었다. 한국의 노인들이 커피 한 잔 또는 감자튀김을 시켜 놓고 두 시간 이상 혹은 하루 종일 매장 테이블에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다른 손님들의 자리를 빼앗고 따라서 영업에 지장을 준다는 것이었다.

맥도날드는 시간에 쫓겨 서둘러 끼니를 때우는 ‘패스트 손님’을 원하는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이다. 만일 뉴욕의 한국 노인들이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마음 편히 앉아서 책이나 신문을 읽거나 친구와 담소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동네 노인정이나 친근한 이웃 찻집 같은 정겨운 공간이 있었더라면 이러한 에피소드가 일어났을까?

글│박진아 미술사학자, 디자인평론가( jina@jinapark.org)

이 에피소드를 둘러싸고 혹자는 미국 내의 인종 갈등의 표현이라고 울분을 토했고, 또 일부에서는 값싼 음식거리를 시켜놓고 긴 시간을 보내는 한인 노인들이 문제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사회학자 레이 올덴버그(Ray Oldenburg)가 이 사태를 보았더라면 그는 “현대 미국사회에 공동체가 파괴되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공공장소가 턱없이 부족’해 생긴 사건”이라고 진단했을 것이다.

일찍이 레이 올덴버그가 1989년에 쓴 『정겨운 장소에 머물고 싶어라(The Great Good Place)』는 정겨운 장소들에 대한 예찬이자 현대화 과정에서 자꾸만 사라져가는 공동체에 대한 애틋한 향수를 담고 있다. 올덴버그는 특히 20세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화된 미국식 도시계획과 교외 부동산 개발산업이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정겨운 공공장소, 더 나아가 공동체가 사라지게 된 이유라고 분석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베드타운(Bed Town)’은 미국 중산층 가족상을 대변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아침에 눈을 떠 한 시간 이상 차를 타고 도심에 있는 직장으로 가 일하고, 저녁이 되면 다시 교외에 있는 집으로 되돌아오는 가장의 생활은 전형적인 공공장소와의 단절을 보여준다. 젊은 시절 자주 드나들던 직장 근처의 맥줏집에도 갈 시간도 없으며, 한다 하더라도 운전을 해야 하니 마음 놓고 술을 마실 수도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담소를 나누던 맥줏집 주인이나 종업원, 친구들과도 소원해지게 된다.

주부들 역시 집과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Desperate House wives)』에서도 잘 그려져 있듯, 결혼 후 도시에서 교외로 이사를 하면서 빵집, 문방구, 미장원, 심지어 아이들의 학교조차 걸어갈 수 없어졌다. 때문에 우유 한 병을 사려 해도 슈퍼마켓이 있는 곳까지 차를 타고 나가야 하고, 친구나 가족을 만나려면 미리 연락해 스케줄을 조율해야만 한다. 그마저도 학부모가 되면 학교, 과외 활동, 방학 캠프 사이를 오가는 자녀들을 데려오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수밖에 없다.

레이 올덴버그는 틀에 박힌 생활에서 오는 따분함과 주변 사람들과 꾸준히 만날 수 없는 데에서 오는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대형 백화점, 쇼핑몰, 스포츠 센터 등 복합 소비공간이 생긴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말한다. 그 결과 미국인들은 계절마다 새 옷을 사고, 수시로 홈 인테리어를 바꾸고, 이삼 년에 한 번씩 새 차로 갈아타는 독특한 소비문화를 정착시키게 되었다. 그는 이것이 주변의 정다운 장소가 사라지고 남은 심리적 공백을 메꿔 보려는 보상심리에서 비롯된 미국 특유의 사회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겨운 장소(The Great Good Place)’란 무엇일까? ‘제3의 장소(Third Place)’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거주의 공간인 가정(제1의 장소)과 노동의 공간인 직장(제2의 장소) 다음으로 인간에게 꼭 필요한 건전한 공동체 공간을 뜻한다. 아무런 형식이나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곳이 ‘제3의 장소’ 즉, 정겨운 장소라는 것이다. 이곳을 드나들며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사회적 지능이 세련돼 교양이 있고 소속감을 느껴 행복도가 높다고 한다.

이탈리아 시골에서는 매일 저녁, 노을이 질 무렵이면 동네 노인들이 우물이 있는 소광장(Piazza)에 하나둘씩 모여 담소를 나눈다. 영국과 아일랜드에는 큰 도시든 작은 마을에서든 골목마다 맥줏집이 있어 퇴근길 직장인들이 들러 맥주를 사이에 두고 회포를 푼다. 프랑스는 카페(Café)와 비스트로(Bistro)를 상대적으로 쉽게 만날 수 있으며, 시민들 모두 여유시간을 보내는 단골 카페가 있다고 한다. 카페하우스(Kaffeehaus)로 유명한 빈에서 일찍이 카페는 정치가, 언론가, 예술가들이 만나 토론하고 함께 작업하는 창조적 오피스 공간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1999년 제3판을 내기까지 이 책에서 레이 올덴버그는 다가올 21세기 스마트 모바일 기기의 시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제3의 장소”는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약간의 먹을거리를 즐기면서, 사람들과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곳이 꼭 아날로그형 공간이어야만 하는 것일까?

21세기형 인터넷 모바일 기술과 더불어 제3의 장소도 스마트한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누구나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가진 오늘날, 카페, 바, 펍 등 공공장소들은 사업 구상, 인맥관리, 미팅을 할 수 있는 제2의 장소로서 기능까지 아우르고 있다.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혼자 생활하는 현대인이 급격히 늘어난 요즘, 제1의 장소를 박차고 나와 제3의 장소를 정보와 지식를 공유하고 아이디어를 발상하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는 불꽃 튀는 영감의 발전소로 활용되고 있다.

지난 2011년 가진 레이 올덴버그가 가진 인터뷰에 따르면, 인터넷과 스마트 기술을 엎고 전개될 21세기형 제3의 장소에 대한 전망은 밝다. 요즘처럼 인터넷 모바일 기술에 따른 가상의 장소가 많아질수록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더 쉽게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상의 제3의 장소에서 만남을 계기로 물리적인 제3의 장소로 나와 직접 만나고 신공동체를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언제까지 과거의 인간관계와 공동체가 붕괴돼 만인이 고독해졌다고 불평만 할 텐가. 현대인들은 가상과 현실 속 공공 장소에서 새로운 인간관계와 공동체 생태계를 형성할 수 있는 주도적 위치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저자 레이 올덴버그 박사는 미네소타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웨스트 플로리다 대학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도시 사회학 분야에서 이론적 논물을 발표해 오고 있으며, 이른바 ‘제3의 장소’ - 즉, 시민사회 속의 허물없고 편안한 공공 장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 3권을 발간하여 뉴욕타임스 기자 선정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공공 공간을 위한 프로젝트(PPS-Project for Public Spaces)의 회원으로 도시계획, 공동체 건설, 개인사업가주의 분야에서 컨설팅 및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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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아 칼럼니스트
미술평론가, 디자인 및 IT 경제 트렌드 평론가, 번역가이다. 뉴스위크 한국판, 월간디자인의 기자를 지냈고,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미국미술관, 뉴욕 모마, 베니스 페기 구겐하임 갤러리에서 미술관 전시 연구기획을 했다. 현재 미술 및 디자인 웹사이트 jinapark.net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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