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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덩그러니

2009-06-30


한 장의 사진을 꺼낸다.
시간의 먼지를 턴다.
예쁜 액자를 골라 끼워 넣는다.
덩그러니 세워 둔다.
덩그러니, 아름답다.

에디터 | 이상현(shlee@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아흔이 넘은 우리 할머니, 강금순 여사. 때 되면 기막히게 손자들 생일까지 기억하시고 일일이 전화 주시는 우리 할머니. “내 강아지” 하며 서른이 넘은 손자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는 살가운 우리 할머니. 늘 두 손을 모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시던 버릇은 당신의 자식과 손자를 거쳐 이제는 증손자들까지도 따라 한다. 마치 개그맨 유행어 따라 하듯이. 시간이 흘러 흘러 나는 삼십대 중반의 아저씨가 되었고, 생업과의 치열한 싸움을 핑계로 수년째 시골에 내려가지 못했다. 그 즈음 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하지만 할머니 생각보다는 언제 올라가야 할지 계산하기 바빴던 나를, 병상에 소녀처럼 누워있던 그녀는 “응 갈래? 내 강아지 갈래? 어여 가 봐” 하시며 선하고 살가운 눈매로 한없이 보듬어주셨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을 걷는다. 까만 양복과 까만 구두. 나, 잘 살고 있는 건가. 식당 아주머니가 버린 백 김치의 국물은 까만 아스팔트 위에 소금 길을 내었다. 할머니의 소금 길을 걸으며 묻고 또 묻는다. 저 잘 살고 있는 건가요. 요즘처럼 힘들고 지쳐갈 때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 살가운 눈인사가 그립다. 요즘처럼 힘들고 지쳐갈 때 사진을 보면서 할머니 소금 길을 따라 걷는다. 가만히 나의 길을 그려본다.

정수현 프로듀서


군대에서 갇힌 공간에 있다는 답답함을 떨칠 수 없을 때, 옹색한 사진첩이라도 들추다 보면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그 중에서도 이 사진처럼 여행 중 찍은 꽃나무 사진들을 보면 더욱 상쾌하다. 오늘 이 사진을 보니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지는 복숭아나무를 보며, 일병 시절에 느꼈던 단상(斷想)이 떠오른다. 꽃을 떨어 뜨려야 하는 고통은 감내할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는 단단히 여문 열매를 거둘 거라는 믿음. 그리고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때가 되면 무언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긍정이, 그 시절 나를 지배한 상념이었다. 올 봄은 유난히 가물어 비 맞을 일 없던 꽃들은 질기게도 오래 매달려 있었던 것 같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자꾸만 흘러서 복사꽃도 폈다 진 것이 이미 오래 전이고, 꽃이 진 자리에는 손톱만한 복숭아가 알알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애 주먹만큼 불어서 터질 듯이 탱탱해질 즈음이면, 나는 제대를 한다. 신나게 달려볼 날이 머지않은 것이다.

윤민석 공군 병장


남자라면 누구나 겪는 2년3개월의 시간. 군복무를 마친 나는 바람을 타고 이스탄불로 날아갔다. 두발을 디딘 땅은 유럽이지만 도시 한가운데 흐르는 바다를 가로지르면 내가 사는 아시아…. 마르마라 해변 다리 위에는 낚시꾼들로 가득 차 있었고, 화려했던 시대를 지금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노을이 물들어 있다. 그날 그 바다에서 보기 힘들다던 돌고래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진 속 나의 시선이, 오늘의 나와 만난다. 세상이 내뱉는 거친 말들이 하나 둘씩 들려오는 요즘, 특허 받을 만한 낙천적인 행동요령을 많이 잃어버린 요즘, 뭐든 놓치기 쉬운 세상 속에서 이 사진이 주는 이야기가 많다. 마르마라해의 바람과 노을 속에서 맛있게 건조되고 포장되어 있다.

이경돈 일러스트레이터


2007년 늦봄과 초여름, 안트워프에서의 사진이다. 도착 직후 맞닥뜨린 예상 밖의 문제 때문에 힘들고 의미 없이 보냈던 4주 후에 맞이한, 그 청량한 마지막 일주일은 지금 같은 초여름이 되면 더 또렷이 떠오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사진은 약간의 자전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오랫동안 나는 스스로와 주변 상황에 대해 수동적이며 소극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갑갑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여러모로 모색해보던 중이었다. 촬영 대상 역시 반응을 주고 받는 인물 사진보다는 일방적으로 관찰하는 시선의 풍경 사진을 주로 촬영해왔던 게 사실이다. 변화는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언제나 서서히 또는 전혀 어긋난 리듬으로 진행된다.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행했다기보다는, 일정 거리를 지나온 뒤에 그러한 변화가 자연스레 일어났음을 문득 깨닫게 되는 것. 짧고 한정된 시간, 달뜬 긴장, 아쉬운 마음이 그대로 녹아있는 이 사진들을 보면 아직도 처음 만났던 그 순간과, 이들과의 가볍고도 어색한 대화 등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아쉬움은 앞으로 더 많은 인물 사진을 찍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만들었고, 나의 개인적인 전환점을 이렇게 아름답게 기록할 수 있었음에 사진이라는 도구에 새삼 감사하고 있다.

이차령 포토그래퍼


넌 어떠니. 잘 생겼든 아니든, 네가 찍힌 사진을 보며 스스로를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적 있니.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히도 난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콤플렉스가 많거든. 군대에서는 58호 모자를 쓰는 병사들이 부러웠고, 누군가의 표현을 빌자면 ‘코끼리 다리’ 때문에 바지 하나도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처지이기도 해. ‘다크 서클’을 감추려고 안경을 쓰고, 똑똑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많은 책들을 읽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과장되게 웃고, 또 힘주어 행동해. 언제부터였을까. 그렇게 자연스레 난 웃는 방법을 잊어 버렸어. 표정을 지을 때도 짐짓 생각부터 하고,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지으려 노력해. 그래. 너에게만 말해줄게. 이 사진은 생애 처음으로 마음에 든, 내가 찍힌 사진이야. 자주 가는 술집 사장이 찍어준 거야. 모르는 새에 날 잡아낸 그 사람의 손짓도 사랑스럽지만,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스스로도, 사랑스럽다.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나도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애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어.

함정훈 출판기획자


여자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있다. 고심 끝에 고른 순백의 드레스에 천사의 날개 같은 면사포를 늘어뜨린 채, 당시 유행했을 ‘워터폴’ 스타일의 부케를 다소곳이 들고, 거울을 바라본다. 사진사의 요구에 따라 거울 앞에서 포즈를 잡으며 여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결혼식으로부터 28년 후 당신의 일상을 알았더라도 그녀는 웨딩드레스를 벗지 않았을까. 어머니도 여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딸은 어떻게든 제 인생을 화려하게 만들어 보려고 애 쓰고, 아내도 여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남편은 제 입에 들어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자신이 여자였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여자는 한 여름에 헤진 속옷을 입고 청소를 하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한다. 여자의 얼굴에 주름살을 만든 건 시간이 아니라 미운 정이 무섭다는 남편과 애물단지 딸년이다. 어린 딸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쏟아 붓는 여자가 못나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키가 줄어들고 주름살이 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딸은 이제 여자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편에게 시시콜콜 잔소리를 하고, 메아리 없는 사랑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며 별반 달라질 것 없는 일상을 참아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어린 딸은 여자의 사랑에 숨이 막혀 감히, 그 사랑을 갚아 주겠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다만 낡은 앨범에서 꺼낸 여자의 사진을 고운 액자에 넣을 뿐이다. 여자의 화려한 시절이 계속되길 바라면서…. 어리석은 딸이 생각할 수 있는 보은(報恩)은 고작 그 따위다.

정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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