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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그리는 것의 의미

2019-02-14

작가들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 그림은 우리에게 어떤 뜻일까. 드로잉은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많은 변화를 거쳐왔고, 디지털 시대인 현대사회에서는 또 다른 모습, 또 다른 가치로 다가온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그림의 의미, 그림에 대한 우리의 취향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전시가 오는 9월 1일까지 디뮤지엄에서 열린다. 

 

디뮤지엄이 올해 첫 전시로 마련한 이번 전시 ‘I draw: 그리는 것보다 멋진 건 없어’는 6개국 16명의 아티스트가 손끝으로 그려낸 그림을 통해 ‘그리는 것’의 특별한 가치를 재조명하는 대규모 기획 전이다.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되며, 16명의 참여 작가들의 작업 세계에 대한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16개의 공간 속에서 펼쳐진다. 

 

드로잉뿐 아니라 일러스트레이션, 오브제, 애니메이션, 설치 작업 등 350여 점에 이르는 작품들은 작가들의 특성을 담아낸 각각의 공간에서 전시된다. 각 작가들의 공간은 창문, 정원, 응접실, 박물관 등 작가들의 작업에 영감을 준 모티브를 바탕으로 꾸며졌다. 전시는 시노그라피(scenography), 향(scent), 사운드(sound)가 접목돼 공감각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세심한 공간 연출을 위해 권경민 건축가가 설계를 맡았고, 씨오엠(COM)과 크래프트 브로 컴퍼니(Craft Bro. Company)가 시노그라피에 참여했다. 향과 사운드 역시 각 공간마다 다르다. 탬버린즈(tamburins)의 전문 조향사들이 향을 제작했고, 사운드는 뮤직 크리에이티브 그룹 스페이스오디티(space oddity)가 선별했다. 각 공간들은 독립적이면서도 전체적인 또 하나의 스토리를 이룬다. 동선 역시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전시에는 주변과 일상에서 마주치는 풍경을 드로잉을 통해 이해하고 수집하는 엄유정, 10대의 나이에 〈뉴요커(New Yorker)〉 표지를 장식한 20세기 일러스트레이션 마스터 피에르 르탕(Pierre Le-Tan), 단순한 색과 형상으로 자연의 계절감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오아물 루(Oamul Lu), 순수하고 매력적인 인물과 다양한 상징 속 스토리를 그리며 구찌(Gucci)의 뮤즈가 된 언스킬드 워커(Unskilled Worker), 여성을 중심인물로 등장시켜 경쾌함과 유머, 은유와 상징을 보여주는 크리스텔 로데이아(Kristelle Rodeia), 40년간 메탈을 소재로 아이코닉한 로봇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며 기계적 판타지를 표현해온 하지메 소라야마(Hajime Sorayama) 등이 참여한다. 

 

유년시절의 노스탤지어와 사이키델릭한 디지털 페인팅으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는 람한, 인간을 포함한 자연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를 기반으로 실재에 상상을 결합해 세밀화를 그리는 케이티 스콧(Katie Scott), 물질성에 대한 관심과 자전적인 이야기로 가구, 오브제, 패션, 드로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페이 투굿(Faye Toogood), 자신만의 화려한 색상의 패턴과 함께 실험적인 낙서 작업을 선보이는 해티 스튜어트(Hattie Stewart), 그래픽, 가구, 텍스타일디자인, 픽토그라피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며, 〈그림서체(Pictograph Font〉로 새로운 이야기를 제공하고 서사와 관계를 유추하게 하는 조규형의 공간은 제각각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네온 등 빛의 산란효과와 몽환적인 컬러를 통해 일상의 고독감과 공허감을 독특한 감성으로 표현하는 신모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겪는 다양한 감정과 마음에 대한 탐구를 검은색 잉크로 그리는 무나씨, 수공적인 화풍의 애니메이션으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며 애니메이션의 확장성과 예술성에 대한 실험을 하는 김영준, 유머러스한 드로잉과 타이포그래피로 회화, 음악, 패션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슈테판 마르크스(Stefan Marx), 정교한 그림, 서정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의 그림책을 발표해 온 쥘리에트 비네(Juliette Binet) 등 자신만의 스타일로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 주목받고 있는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공간은 엄유정 작가의 ’드로잉, 모든 것의 시작’이다. 16개의 공간 중 가장 넓은 공간으로, 인물, 풍경, 사물 등 일상에서 접하는 주제를 통해, 친근하게 관람객과의 소통을 시작한다. 

 

‘I draw: 그리는 것보다 멋진 건 없어’전. 피에르 르탕의 작업 세계가 펼쳐진 공간 ‘낯선 사물을 찾다’. courtesy of D MUSEUM

 



‘상상 속에 가두다’, 언스킬드 워커. courtesy of D MUSEUM

 

 

피에르 르탕의 공간 ’낯선 사물을 찾다’는 창을 소재로 하는 그의 작업과 어우러진다. 십자 긋기(cross-stitch) 화법으로 형태와 음영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그는 사물과 공간에 몰두한다. 사물이나 인물을 바라보는 시점도 독특하다. 7~8세부터 현재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예술작품과 사물들을 수집해온 그는 그림에 그의 컬렉션이 등장시키기도 한다. 전시장에는 그가 수집한 루이 16세 때의 의자에 그림을 그린 작품이 함께 전시되기도 한다.   

 

언스킬드 워커는 48세에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했지만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큰 주목을 받았다. 그의 그림에서는 암울하면서도 순수한 감정이 전해진다. 어둡게 연출된 공간은 그림 속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게 한다. 

 


‘판타지의 문턱을 넘어서다’, 하지메 소라야마. courtesy of D MUSEUM

 

‘유리 장미, 소라, 별, 어젯밤’, 람한. courtesy of D MUSEUM

 

 

‘판타지의 문턱을 넘어서다’라는 제목처럼 하나의 문턱을 넘어서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기도 한다. 전시장 안에 설치된 파빌리온으로 들어서면 인간의 형체를 정확히 닮은 여성 로봇 조각과 일러스트레이션을 볼 수 있다. 하지메 소라야마는 핀업걸(pin-up girl)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에어브러시 페인팅 기법으로 사실적으로 여성 로봇을 표현, 인간과 기계에 대한 통합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만화가인 람한 작가는 1989년 생으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답게 디지털 페인팅으로 흡입력 있는 색과 연출을 선보인다. 일부 작품이 걸린 계단의 벽은 어린 시절 작가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했던 방의 벽지를 표현한 것이다. 

 


‘미로 속에 머무르는 환상’, 케이티 스콧. courtesy of D MUSEUM

 

‘지나간 기억을 간직하다’, 페이 투굿. courtesy of D MUSEUM

 

 

케이티 스콧의 ‘미로 속에 머무르는 환상’은 작가가 연구를 위해 많은 시간 머물렀던 박물관, 도서관에 영감을 받아 꾸며진 공간이다.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 제임스 폴리(James Paulley)와 플라워 아티스트 아즈마 마코토(Makoto Azuma)와의 협업으로 완성된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을 담은 애니메이션 〈꽃의 이야기(Story of Flower)〉도 상영된다. 

 

페이 투굿은 천연 소재에서 영감을 찾고 재료의 본질적 아름다움에 관심을 갖는다. 전시장에 마련된 〈드로잉 룸(The Drawing Room)〉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그려진 방으로, ‘drawing room’은 영국식 시골집 응접실을 뜻하기도 한다. 벽에 걸린 천엔 찬장, 창문, 액자, 식물 등 작가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메롱, 낙서폭탄’, 해티 스튜어트. courtesy of D MUSEUM

 

 

 

스스로를 ‘전문낙서가(professional doodler)’라 칭하는 해티 스튜어트는 자신만의 대담하고 실험적인 작업을 통해 일러스트레이션의 경계를 넘나든다. 오마주와 풍자를 담아 〈인터뷰(Interview)〉, 〈보그(Vogue)〉, 〈아이디(i-D)〉, 〈플레이보이(Playboy)〉 등 영향력 있는 잡지 커버 위에 낙서를 하듯 그림을 그리는 〈낙서폭탄(Doodle bomb)〉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이 프로젝트와 함께 방 전체를 이미지로 채워 관람객에게 또 다른 시각을 선사하는 작품도 전시된다. 

 

쥘리에트 비네는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그림책을 발표하며, 책이 지닌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인쇄 형식을 시도한다. 마치 그림책을 연상케 하는 공간에 설치된 세밀한 그림들은 이미지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를 전하며, 그림책 혹은 드로잉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변화된 사회에서 작가들은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거나 새로운 기법을 접목해 작업한다. 그것이 어떠한 방식이든, 디지털화된 이미지가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과거와는 다르게 작품을 바라보고 있다. 

 

이번 전시는 작가들이 손으로 그린 특별한 이야기와 그것에 담긴 섬세하고 미묘한 감성을 전하며,작가들의 다양한 작업 방식은 물론 그 의미를 살펴보게 한다. 또한, 기계문명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손으로 그리는 것의 의미와 그림에 대한 취향을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에디터_ 최유진(yjchoi@jungle.co.kr)
사진제공_ 디뮤지엄(www.daelimmuseum.org/d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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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진 에디터
감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디자인, 마음을 움직이는 포근한 디자인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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