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7
백두대간 금강산 1만2천봉의 남쪽 끝자락 마산봉 아래, 깊은 산골인 이곳에는 특별한 곳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심심해書 심심한家’이다. 심심해서 심심한가는 책방 ‘심심해書’와 스테이공간 ‘심심한家’로 이루어져 있다. 책읽기와 쉼이 가능한 북스테이 공간인 ‘심심해서 심심한가’의 이름은 고 박완서 선생의 수필 내용 중 "심심하고 심심해서 시를 읽는다. 왜 사는지 모를 때도 위로 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의 책방지기는 충청도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공부를 마치고 34년간의 직장생활을 한 후, 젊은 시절부터의 오랜 꿈이었던 책방을 운영하기 위해 이곳 흘리마을에 정착했다. 아직까지 도시생활이 더 좋다는 그의 아내는 그리고 만들고 꾸미는 일에 솜씨를 내는 미술전공자 재주꾼으로, 책방과 주변의 정원을 손수 가꾸어가고 있다.
온전한 쉼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 '심심해서 심심한가'
책에 대한 애정으로 시작된 공간
이들 부부가 ‘심심해서 심심한가’의 문을 열게 된 것은 2023년 여름이었다. “코로나19가 거의 진정될 무렵인 2022년 1월에 저는 직장생활을, 아내는 4년여간 운영해오던 자영업을 정리하고, 이후 제2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최적의 거처를 찾기 위해 1년 넘게 섬을 제외한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 겸해서 수백 여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다 2023년 4월에 이곳으로 거처를 정한 후 6월말에 이사를 왔죠. 한달여간 공간 개보수와 책장 등 비품 준비, 책 진열작업 등을 거쳐 아내와 둘이서 8월 1일부터 영업을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아 소리소문 없이 문을 열었습니다.”
책방지기가 책방을 하겠다는 꿈을 꾸고 책방을 연 데는 무엇보다 책에 대한 애정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교과서 외의 책은 거의 읽지 않았던 그가 편집증적일 만큼 책을 구입하고 읽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한 후였다. 도시에서 자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그간 너무 책을 읽지 못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강의시간 외에는 거의 모든 시간을 도서관과 도심지역의 대형서점을 도는 것에 쓸 만큼 책 읽기에 열정적이었던 그는 ‘어렸을 때 그런 책들을 읽었었더라면 더 큰 꿈을 꿀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갖게 됐고, 언젠가는 산골마을 고향 마을에 책방을 열어 후배들이 자신과 같은 후회를 하지 않게 해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첩첩산중 오지의 산골마을을 제2의 삶의 터로 정했을까. 그가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부부가 생각해 온 최우선 고려조건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원래 자신의 고향 산골마을에 가서 고향 선후배들과 어울려 책 읽기를 중심으로 하는 커뮤니티 거점을 꾸려가겠다는 꿈을 어릴 적부터 가져왔던 그는, 집성촌이었던 그 산촌이 세종시 권역으로 편입되면서 산골로서의 특성이 파괴되어 꿈을 실현하기에 적절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판단에 포기를 했고, 결국 이곳을 택했다. “사돈의 팔촌까지 다 뒤져서도 학연, 혈연, 지연 등 연줄이 없는 곳이 최우선 조건이었고, 그에 못지않게 축사 등 혐오시설이 없는 곳, 그리고 누군가가 먼저 동네책방을 하는 곳이 없어서 경합을 하지 않는 곳에 책방을 내고 싶었어요. 이런 조건들에 산 좋고 물 좋은 곳, 즉 자연환경이 좋은 여러 곳을 찾아 다니다가 결국 이곳 흘리마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가 직접 가꾼 정원의 모습
알리지 않았지만 알려진 곳
'심심해서 심심한가'의 문을 열긴 했지만 이들 부부는 따로 간판을 걸거나 오프닝 행사를 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조차 이곳에 책방이 생겼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했을 정도. 하지만 이들 부부의 공간은 입소문을 타고 점차 알려졌고, 그들의 공간을 사랑하는 마니아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산골에 있는 이곳을 찾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쉼’에서 바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쉼’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쉼’을 테마로 하고 있어요. 서비스업에서 34년을 일하면서 고객의 요구에 최대한 맞춰가며 살아오다 보니 사회생활 막바지에는 제 스스로 거의 번아웃이 될 것 같은 위기를 겪었죠. 그래서 이곳에 온 이후로부터는 철저하게 제가 하고 싶은 것만, 제 방식으로 하며 살아야겠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아내 역시 자영업을 해오면서 저보다 더 많이 지쳤었고요. 그래서 우선 우리 부부에게 필요한 쉼을 테마로 하는 공간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오픈형 서재방식을 지향하는 이곳은 책의 판매를 우선하는 곳이 아니라,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 방문하는 이들이 하나의 콘텐츠로서 서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책을 읽고 쉬고 먹을 수 있는 공간
'심심해서 심심한가'의 공간은 2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로에 접하고 있는 21평 규모의 단층 건물은 지난 2006년에 폐업한 알프스리조트가 운영 시에 스키렌탈숍으로 사용했던 곳으로, 부부는 직접 이곳을 오픈서재형 책방공간으로 개조했다. 이곳에서는 동쪽으로는 마산봉, 남쪽으로는 200여평의 잔디밭과 수리봉·신선봉을 직관할 수 있다. 내부는 2개 공간으로 나뉜다. 남쪽(14평) 공간은 문학과 예술 중심 책이 비치되어 있어 다과를 즐기며 책을 보거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북쪽(7평) 공간은 건축, 인문, 마케팅, 시집 등과 대형 테이블이 비치되어 있어 모임 등을 가질 수 있다.
안쪽 건물은 약 61평 규모의 2층 건물로, 2층은 이들 부부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다. 넓은 주방에서는 아내가 빵과 쿠키 등을 구워 책방이용객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1층은 7~8평 규모의 원룸형 방이 4개가 있어 스테이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그 중 3곳은 2인이 사용가능한 더블베드가 설치된 침대형이고, 1곳은 3~4인의 가족이 사용 가능한 온돌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부에 있는 약 130여 평의 텃밭에는 30여 종의 작물이 자라고 있어 누구든 시기에 따라 원하는 것을 따갈 수 있고, 정자가 자리하고 있는 200여 평의 잔디밭에서는 골프 어프로치, 파크볼, 배드민턴 외에 다양한 아웃도어 활동을 즐길 수 있다. 책방의 텃밭 공간에는 앞으로 목공예를 전공한 아내가 작업을 할 수 있는 작은 목공방 공간을 증축할 예정이다. 집 전체의 주위로 수령 20년 이상된 3~5m높이의 측백나무 울타리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데, 측백나무가 여러 효능을 가진 천연약재로 알려져 있어 밥을 짓거나 물을 끓일 때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들 부부는 쉼이 있는 공간으로 운영하기 위해 20년이 넘은 낡은 건물을 시차를 두고 리뉴얼하고, 스테이 공간에는 안락한 수면과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침대와 침구에 특히 신경을 썼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모토로 운영되고 있는 이 공간에서는 사전 예약을 하면 아내가 준비한 제철음식을 맛볼 수도 있고, 책방 공간 또는 잔디밭 등에서 캠핑라이프를 즐길 수도 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이곳에서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특별한 경험이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3천여 권의 책들
주인장의 책과 쉼에 대한 철학으로 가득한 이곳엔 3천여 권이 넘는 인문과 예술, 문학, 역사, 마케팅, 건축 분야의 책들이 자리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 책들 중 판매를 위해 구입한 책은 단 한권도 없다. “책은 단 한 권도 판매를 위해 구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공과 취향이 서로 다른 우리 4식구가 30여 년간 읽어온, 그리고 지금도 읽어가고 있는 책을 소장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읽었던 책들은 대부분 나눔 또는 폐기하고 일부만 가지고 왔고, 20여 년간 모아온 10여 종의 잡지들도 대부분 폐기하고 일반 도서를 중심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공교롭게도 우리 가족은 책 읽기에 편식이 심해서 시집과 같은 특정 장르 혹은 특정 작가의 책이 비교적 많이 있습니다.” 이곳에 와서도 이들 부부는 오로지 그들이 읽기 위한 책들을 계속 구입하고 있다. 그 양도 벌써 수백 권이 넘고 있다.
책방의 책들은 이들 부부가 이곳에 이사를 온 후 구입한 책들을 제외하고는 99%가 오프라인 매장에서 구입한 것들이다. “직접 서문, 목차, 지은이 소개 등을 꼼꼼하게 읽어본 후에 구입을 한다는 나름의 원칙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또한 가능하면 1권 1쇄를 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것 역시 스스로 정한 기준이었죠. 온라인으로 구입시 1쇄(초간본)를 구입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한 점도 작용해 제값을 지불하더라도 가능한 오프라인 구매를 기준으로 정했었습니다.”
이곳엔 3천여 권의 책들이 소장되어 있다.
주인장의 마음이 담긴 ‘책방이용 설명서’
책방의 벽에 붙어있는 ‘책방이용 설명서’의 내용에 눈이 간다. "책방 이용설명서"에 기재된 바처럼 어떤 제목의 책이 어디에 비치되어 있는지는 알려드리지 못하지만, 소장여부는 제 기억으로 알려드리고 있습니다. 검색을 통해 쉽게 책을 찾아 구매하거나 읽기보다는 책방을 돌아보면서 ‘이런 책도 있었네’ 하는 발견의 기쁨을 누리길 기대하고 있어요.” 서가별로 부부가 함께 정한 카테고리에 따라 계속해서 책을 늘려가고 있다.
가족의 손때가 묻은 책들은 책에 쓰인 정가로만 판매가 이루어진다. 판매를 하고는 있지만 다른 누군가가 읽을 수 있다면 그 책을 판매하는 것보다 소장하고 있을 때의 가치가 더 높다고 생각하는 이들 부부는 이곳을 찾는 이들이 억지로 책을 구입하지 않기를 더 바란다. 그래서 구입을 원하는 손님에겐 꼭 책을 구입해야 하는지를 재차 묻기도 한다. 책방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며 책을 구입하고자 하는 이용객들이 있지만 이 부부가 진짜 바라는 것은, 이 공간 전체와 주변의 천혜적인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편안한 쉼을 즐기는 것뿐이다.
심심해서 심심한가의 '책방 이용 설명서'
책방엔 책 외에도 CD와 DVD 등이 자리하고 있다.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계속 창작활동을 해 나갈 수 있기를 응원하는 마음에서 구입한 것들인데, 이사를 오고 나서는 오프라인 음반매장을 찾기 힘들어 가끔 도시에 나갈 때나 주로 클래식 장르의 CD를 구입해오고 있어요.”
이들 부부는 제한된 공간을 이유로 지금까지 정중하게 사양해 온 외부로부터 책을 기증받는 일도 본격적으로 수용할 계획이다. “기증자를 표기하는 서가를 별도로 운영하고, 스테이공간에도 문학, 예술, 인문, 과학 등 장르별로 공간을 네이밍해서 이용자의 선택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에요. 다만 우리 책방에 비치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책들은 다른 누군가에게 나눔을 해 주는 것에 동의한 분에게만 기증을 받고자 합니다.”
느리게, 여유 있게 쉼을 누리길
기본적으로 느리게, 여유 있게 살아가기를 실천하려는 이들 부부의 노력은 이곳에서 제공되는 음식에서도 느낄 수 있다. “우리 부부가 가꾸는 텃밭과 마을 주민들이 경작하고 있는 제철 작물, 그리고 주변 자연에서 채취하는 버섯과 나물류 등을 식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주로 싱싱한 채소를 식재료로 사용하는 메뉴를, 겨울과 봄철에는 저장 식재료를 사용하는 요리를 하고 있습니다.” 향후 이들은 마을의 특산품인 황태와 피망을 주요 식재료로 하는 메뉴도 개발해 나갈 예정이다.
책방의 시그니처 메뉴로는 건강 빵이 손꼽힌다. “이스트를 사용하지 않는 자연 발효시킨 발효종을 프랑스산 유기농 밀가루와 호밀, 통밀 등의 반죽에 여러 종류의 견과류를 넣어서 구운 빵을 판매하고 있는데요, 지금은 아내가 주5일 외부에서 일을 하고 있어 토요일에만 빵과 쿠키 등을 만들고 있어요.” 필요에 따라 3일 전까지 주문을 하면 빵과 쿠키를 따로 굽기도 한다. 음료는 드립 커피를 기본으로 하지만 커피를 선호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국화차, 자스민차 등을 제공한다.
"지친 자들이여, [심심해書]와 [심심한家]에 오라"
이들 부부는 이곳이 쉼의 베이스캠프가 되기를 꿈꾼다. “지친 심신을 재충전하기 위해 우리 책방에 방문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잘 수도 있고, 중간중간에 책방에 들러 책을 볼 수도 있어요. 그리고 속초, 고성, 인제 지역의 관광지를 돌아보거나 마을 주변에 있는 계곡 트레킹, 임도 오프로드 라이딩, 산행 등도 선택하여 즐길 수 있어요”
책방은 이들 부부가 병원에 가거나 경조사 등 특별한 일로 자리를 비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휴로 24시간 개방 운영되고 있다. 물론 이들이 자리를 비울 때에도 이용자가 원하면 책방의 문은 언제나 열린다. 책도 책방에서뿐만 아니라 스테이공간, 잔디밭, 정자, 마산봉 주변 크고 작은 계곡 등 어디서나 휴대하여 읽을 수 있다. “책을 읽는 것 말고도 피아노, 기타 등의 악기를 연주할 수도 있고, 배드민턴, 골프(퍼팅), 파크 골프 등도 잔디밭에서 즐길 수 있고, 책방에 있는 오디오기기를 이용하여 비치되어 있는 수백 장의 CD나 LP를 골라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다양한 미술 도구로 그리기, 만들기 등도 즐길 수 있어요. 반경 3~40km권에 있는 여러 관광지(동해안 바닷가, 설악산, 고성팔경 등)에 다녀올 수도 있고, 마을 주변에서 등산, 오프로드 라이딩, DMZ평화의 길 트레킹 등도 즐길 수 있죠. 이런 다양한 콘텐츠 중에서 선택해 무엇이라도 할 수도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진정한 쉼을 즐길 수 있습니다.”
눈이 쌓인 아름다운 겨울의 풍경
이들 부부는 지역과의 공생을 위해 또 다른 계획을 구상 중이다. 마을의 주산물인 피망과 고랭지 채소의 주 소비기업과 아웃도어 기업 등과의 자매결연을 통한 스폰서쉽을 체결해 새로운 도농간 상생구조를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한 이들 부부는 40대 귀촌 청년들과 함께 지역의 자연환경을 활용한 체험형 아웃도어 라이프의 발산기지로의 전환을 구상, 스키장 운영 시 지어진 여러 대형 건물과 폐교 시설을 이용해 여러 편의시설을 유치하고자 하며, 도시 생활을 하며 구축해온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귀촌을 준비하는 이들의 사랑방 역할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심심해서 심심한가’는 일상에 지친 모든 이들의 쉼터가 되었다. 온전히 책에 빠져들 수 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 게으름이 허락되는 곳,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며 콘텐츠를 즐기고 만들어갈 수 있는 이곳은 온전한 쉼과 삶에 대한 충전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늘 무언가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준 이들 부부에게 문득 무척이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간성읍 흘리길 176 (흘리), 화, 수요일 휴무
인터뷰어_ 정석원 편집주간
에디터_ 최유진 편집장
사진제공_ 심심해서 심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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