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3-09
여행을 하더라도 완벽하게 여행자가 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각지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은 피하고 싶어, 늘 들었던 음악만 들으며 익숙한 듯 거리를 걷고, 아는 사람만 찾아올 법한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신다. 사람 구경을 하면서 잘 알아듣지도 못할 옆 테이블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본다. 해가 저물 무렵이 되면 주섬주섬 테이블에 늘어놓았던 물건들을 가방 속에 챙겨 넣고, 카페의 문을 열고나서는 순간, ‘아,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글 | 정혜원 정글리포터
사진 | Le Van Bo 제공
에디터 | 최유진(yjchoi@jungle.co.kr)
모든 것이 다 낯선 여행지에 와 있지만, 숙소로 돌아갔을 때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 이와 익숙한 냄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여행 중에도 가끔은 새 이불이 깨끗이 깔린 ‘호텔방’이 아니라 차마 정리하지 못하고 나온 이불이 펼쳐져 있는 ‘집’이 그립다. 이럴 땐 ‘B&B’를 찾아보자.
B&B란, 다양한 숙박 방법의 하나로 ‘Bed&Breakfast’를 뜻하는 말이다. 그 지역에 실제로 사는 사람이 자신의 집을 내놓고 잠자리를 포함한 최소한의 것을 제공하는 것인데, 집주인이 방문객과 함께 지내기도 하고, 여행자가 머무는 동안 주인이 잠시 집을 비워주는 예도 있다. 여행지의 문화와 생활을 좀 더 살갑게 느껴보고 싶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이 바로 B&B다.
일단, 저렴하다는 것은 B&B의 가장 큰 장점이다. 최고급호텔 못지않은 으리으리한 집도 있지만, 보통 1박에 $100 이하로도 다양한 집을 선택할 수 있다. 다만, 궁금한 것에 대해 물어보거나 가격 흥정을 할 땐 수시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인데,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드높은 언어 장벽을 뛰어넘어가며 통성명을 하고 수많은 정보를 교환하는 철저한 사전준비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런 사건이 터지는 경우도 있다. 아주 가끔 B&B를 이용해 본 사람들 사이에서 ‘여행 가기 하루 전날, 주인이 예약을 취소했다’, ‘집주인이 파티 여는 것을 좋아해서 밤새 시끄러워 잠을 못 잤다’ 같은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행지에 도착하고 나서 문득 ‘이 사람은 뭘 믿고 나한테 열쇠를 맡긴 거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건 호스트와 호스티스 간의 ‘신뢰’이다. 여행을 하는 사람은 떠나기 전날까지 집주인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고, 여행객을 맞이하는 사람은 이렇게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 집을 선택한 여행객을 환영할 준비를 한다.
Le Van Bo in Berlin
베를린 쿠담(Kurfürstendamm, 줄여서 Ku'damm)에 거주하는 Le Van bo는 건축가이자 DIY 가구 제작자이다. 20년대 후반의 바우하우스에 영향을 받은 가구를 만드는 그는 베를린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집을 제공한다. 무료는 아니지만 디자인과 가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베를린을 좀 더 따뜻하게 느껴 보고 싶다면, 그를 만나 보도록 하자.
“우리 집에 머물렀다가 가는 모든 사람들이 베를린과 사랑에 빠지도록”
당신도 여행을 좋아하는가?
물론이다. 특히 도시 여행을 좋아한다. 여자 친구와 여행을 할 때는 항상 그 지역의 실제 집을 단기간 예약한다. 더 많은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서다. 그 나라 사람들, 그 집의 주인은 어떤 책을 보는지, 어떤 DVD를 소장하고 있는지, 어떠한 음악을 즐겨 듣는지 하나하나 알아내는 과정이 즐겁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은 어떤 여행인가?
이탈리아 로마를 여행했을 때였다. 예술을 공부하는 한 학생 집에서 머물렀었는데 그 집에서 우연히 조지 해리슨의 앨범을 듣게 되었다. 그때부터 난 조지해리슨의 팬이 되었다. 당시 여행을 하고 있던 나는 그 이탈리아 학생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도 내 공간을 활용한 B&B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 집에 머물렀다가 가는 모든 사람들이 베를린과 사랑에 빠지도록, 또 독일인의 삶에 매력을 느끼게끔 해주고 싶었다.
“내가 사랑의 큐피드 역할을 한 것 같아 기쁘다”
B&B를 운영해 오면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베를린에 사는 한 남자가 다른 지방에 살던 그의 여자 친구와 함께 지내기 위해 우리 집을 예약한 적이 있었다. 한편으로 나는 이 남자가 자기 집을 두고 왜 굳이 남의 집을 이용해서까지 여자 친구를 초대하는 건지 의문점이 들었다. 알고 보니 당시 그의 집에는 그의 전 여자 친구가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연인은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갔다. 그날, 그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멋진 하루를 선물해 준 것이고, 나는 그들이 아름답게 머물 공간을 마련해 준 셈이다. 지금 그 둘 사이엔 아주 귀여운 딸 아이가 하나 있다. 그들은 지금 베를린에 같이 산다. 그들이 베를린이라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지도록, 또 그들 서로가 사랑에 빠지도록 내가 사랑의 큐피드 역할을 한 것 같아 기쁘다.
당신의 집은 디자인을 사랑하는 여행자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라고 생각한다. 집에 머물다 가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 놓는 것이 있는가?
우리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겐 언제나 베를린에 관한 정보를 알려준다. 베를린의 역사, 동과 서를 가르던 베를린 장벽에 관한 이야기, 이곳에서 꼭 가봐야 할 곳 같은 것들 말이다. 가끔은 그들의 여행 안내자로도 나선다. 집의 한쪽 벽에는 ‘Wall of fame’이라는 공간이 있다. 사람들이 멋진 카페나 식당에 들러 방문 흔적, 메모를 남기는 것처럼, 우리 집에 머물렀던 여행자들이 추천하는 장소, 맛집 등을 적어 놓은 것이다.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쌓여서 한쪽 벽을 꽉 채우게 되었다. 또, 실내장식이나 가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도 내가 아는 것들에 한해선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내가 먹고 자고 하는 내 집이기 때문에 벽이며 가구들이며 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60년대에 병원에서 쓰던 의자, 내가 좋아하는 베를린 디자이너가 만든 테이블, 이웃집 화가에게 영감을 얻어 색칠한 벽, 그리고 내가 만든 DIY 가구까지,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사람들은 재미있어한다. 그럼 나도 즐겁다.
오래된 가구는 어디 가서 사면 좋은가?
플리마켓을 추천한다. 베를린에서도 플리마켓이 자주 열린다. 내가 자주 가는 곳은 ‘Arkona Platz’이다. 작지만 많이 붐비지 않고, 좋은 램프와 의자를 발견할 수 있어서 좋다. 가끔 70년대의 덴마크 가구도 볼 수 있다.
여행안내 책이 일러준 적 없는, 당신만의 베를린 여행 법이 있다면?
그냥 우리 집에 오면 다 알려주겠다! 사실, 어떤 여행안내서도 베를린에 관한 정보를 모두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서울도 그렇듯이 베를린도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뀐다.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있던 것이 없어진다. 변화는 일상이다.
"Build more, buy less!"
디자이너로서, 혹은 여행자를 맞이하는 집주인으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약 1년 전부터 ‘Hartz IV Möbel(하츠 4 모벨)’이라는 이름의 ‘Do It Yourself(DIY) 프로젝트’를 해 오고 있다. 이름의 ‘Hartz IV’는 독일의 사회복지정책에서 따온 말이고, 'Möbel'은 가구를 의미한다. 즉, 저렴하게 살 수 있고, 누구나 쉽게 다룰 수 있는 가구를 만들어서 최종적으로는 그러한 DIY 가구만으로 이루어진 집을 기획해 보려 한다. 현재는 가구만 몇 개 만들어 놓은 상태다.
당신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집은 어떤 것인가?
Mies Van Der Rohe(미스 반 데어 로에)가 지은 Farnsworth House와 같은 집을 좋아한다. 기단 8개와 평평한 지붕과 바닥만으로 설계된 아주 단순한 집이다. 요란한 장식도 없다. 이 집은 넓고 큰 유리창 때문에 집 안에 있어도 밖에 있는 기분이 든다. 이처럼, 여름에 모처럼 휴가를 낸 여행자들이 잠시 시간을 보내고 가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그것도 물론 DIY를 이용한 방법으로! 내가 써 놓은 설명서대로, 준비된 재료를 갖고 사람들이 직접 짓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좋아지도록,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며, 응원할 것이다. 더 짓자, 그리고 덜 사자!
사람들은 ‘Le Van Bo’를 가리켜 프라임(Prime)이라 부른다. 그의 집을 이용해 본 방문객들은 그를 ‘최고의 호스트’라고 생각한다. 따뜻함이 공존하는 그의 공간에서는 사랑이 시작된다. 앞으로 그의 집에선 더 많은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이제는 ‘먹는 대로 돈을 내야 하는 호텔 냉장고’는 필요 없다. 깃발 부대는 이제 촌스럽다. 베를린에 관한 좋은 정보만 꿰차고 있는 든든한 여행 안내자이자, 가구 하나를 만들어도 삶의 질을 제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 그의 손길이 닿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그가 디자인한 테이블 위에 놓인 그가 준비해 둔 과일을 먹고, 벽 쪽으로 가서 그의 집을 방문한 사람들이 적어 놓은 메모에서 가고 싶은 카페를 골라 찾아간다. 가는 길에 그가 알려준 집 근처 빵집에 들러 독일 빵을 하나 사 먹는 것도 잊지 않는다.
www.weekend-in-berlin.de에서 그의 집을 예약할 수 있으며, hartzivmoebel.blogspot.com에서 그가 만든 가구를 엿볼 수 있다.